디가 니까야 <제3권 빠띠까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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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빠띠까 품 목차경 번호페이지
빠띠까 경-신통 사기꾼D2433
우둠바리까 사자후경-진정한 고행의 완성D2583
전륜성왕사자후경-인류의 타락과 향상의 역사D26117
세기경-세상의 기원D27151
확신경-부처님께 바치는 확고한 믿음D28183
정신경-청정한 믿음을 내게 하는 가름침D29215
삼십이상경-서른두 가지 대인의 상호D30259
교계 싱갈라 경-재가지의 삶D31309
아따나띠야 경-아따나띠야 보호주(保護呪)D32333
합송경-함께 노래한 부처님 말씀D33355
십상경-열 개씩 열까지D34467




<제3권 빠띠까 품 해제(解題)>

  

1. 왜『빠띠까 품』인가

 『디가 니까야』는 모두 34개의 경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다시『계온품』과『대품』과『빠띠까 품』의 세 품으로 나누어지고, 각각 13개, 10개, 11개의 경들을 포함하고 있다.『디가 니까야』제3권은『빠띠까 품』이라 부른다. 이는 빠알리어 빠띠까왁가(Pāṭika-vagga)를 옮긴 것인데, 여기서 빠띠까는 본 품의 첫 번째 경인「빠띠까 경」(Pāṭika Sutta, D24)의 이름을 딴 것이다.

『디가 니까야』의 첫 번째 품을『계온품』(戒蘊品, Sīlakhandhavagga)이라 이름한 것은 제1품에 속하는 13개의 경들이 모두 예외 없이 계의 무더기로 불리는 정형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강조하여 붙인 것이고, 두 번째 품은 이 품에 속하는 10개의 경들의 제목에 대(大, mahā)가 들어갔거나, 다른 경들을 확장하였거나, 대(mahā)가 들어간 경들과 연관이 있는 경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대품』(大品, Mahāvagga)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세 번째 품을 다만『빠띠까 품』이라 하여 본 품의 첫 번째 경의 이름을 그냥 가져다 쓴 것은 이 자체가 벌써 본 품에는 이 품을 구성하고 있는 11개의 경 전체를 규정할 특별한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본 품은 잡다한 품(miscellany)이라 부를 수 있겠다. 34개의 긴 경들 가운데서 어떤 규칙을 발견할 수 있는 경들 23가지를 가려내어 제1품과 제2품에 배치하고, 남은 경들을 나머지 제3품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2.『빠띠까 품』은 출가품이다

그러면 과연 제3품『빠띠까 품』은 전체를 아우를 어떠한 공통점도 발견할 수 없는가? 역자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본 품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기본 정신을 역자는 출가(pabbajita, 혹은 pabbajana)라고 파악한다. 이런 입장에서 본 품에 실린 경들을 개관해 보자.

먼저「빠띠까 경」(D24)은 출가와 환속이 경의 중요한 주제며 신통과 고행이라는 이적에 눈을 팔아서는 출가의 성스러운 결실인 해탈․열반을 결코 실현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해준다.

「우둠바리까 사자후경」(D25)의 기본 주제는 출가의 본분사가 뭐냐는 것이다. 니그로다라는 유행승과 그의 제자들은 고행과 금욕과 삼매와 신통 이상의 출가의 궁극적 목적을 알지 못한다.

「전륜성왕 사자후경」(D26)도 출가 비구들에게 인류의 타락과 향상의 유장한 역사를 말씀하시지만 출가 비구의 본분사인 자등명․자귀의, 법등명․법귀의를 설하시고 그 방법으로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四念處]를 설하시는 것으로 가르침을 시작하고 마무리 지으신다.

「세기경」(D27)도 출가하여 견습 기간(일종의 행자생활)을 거치고 있는 두 바라문 학도에게 세상의 기원을 설하시지만 그 목적은 결국 네 계급이 어느 계급 할 것 없이 “몸으로 단속을 하고 말로 단속을 하고 마음으로 단속을 하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菩提分法]들을 닦아서 지금여기에서 [오염원들을] 완전히 적멸하게 하여 열반을 얻는다.”(§30)는 사문의 본분사를 설하시기 위함이다.

「확신경」(D28)은 출가하여 장부일대사를 해결한 법의 대장군이요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 존자가 왜 자신은 부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밝히는 경이다.

「정신경」(D29)은 세존께서 비구 승단에 대해서 가지고 계시는 청정한 믿음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경이다.

「삼십이상경」(D30)도 출가 비구들에게 설하신 경으로 천․인(天․人)의 대 스승이신 부처님이 갖추신 32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따나띠야 경」(D32)은 보호주인데 약카들이 이 보호주를 호지하는 부처님 교단과 신도들을 보호하겠다는 서원을 하는 경이다.

「합송경」(D33)과「십상경」(D34)은 사리뿟따 존자가 비구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수별로 정리해서 수지할 것을 설하는 경이다.

이처럼 제3품에 포함된 경들 가운데「교계 싱갈라 경」(D31)을 제외한 나머지 10개의 경들에서는 모두 출가의 궁극적 목적과 출가 생활에 대해서 말씀하셨거나, 적어도 출가한 비구 대중이나 출가하려고 견습 기간을 가지는 자들이 청법자(聽法者)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제3품은 차라리 출가품(Pabbajita-vagga, 혹은 Pabbajana-vagga)으로 명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3. 늦게 결집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역자가 앞에서 잡다한 품이라고 표현했다 해서 혹시 본 품에 포함된 경들은 더 늦게 결집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즉시 그런 생각을 거둬주실 것을 당부한다. 본 품은 오히려 부처님의 메시지를 더욱 분명하게 수행자 집단(그것이 불교 수행자든 외도 수행자든)에게 천명하고 있다. 이처럼 본 품은 출격대장부의 길을 천명하시는 아주 중요한 경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경들이 다른 경들보다 늦은 시기에 결집되었을 것이라는 아무런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늦게 결집된 경들이 없는가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차라리 확장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대인연경」이나「대반열반경」이나「대회경」이나「대념처경」을 포함하고 있는, 본서 제2권『대품』에 더 주목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대품』의 경들이 후대에 결집되었을 것이라는 아무런 근거는 없다.

이 정도로『빠띠까 품』에 대해서 개관을 해보고 이제『빠띠까 품』의 각 경들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4.『빠띠까 품』각 경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⑴「빠띠까 경」(Pāṭika Sutta, D24)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절집에 출가하러 들어오면 제일 먼저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출가란 완전히 출가하는 사람 개인 의지이다. 아무도 출가하라고 부추기지 않고 환속한다 해서 잡지 않는다. 부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환속을 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사이다. 예를 들면 본서 제1권「뽓타빠다 경」(D9 §32)에 나타나는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는 이미 7번이나 환속하였고 8번째에 자아에 관한 세존의 법문을 듣고 다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본경은 릿차위의 후예 수낙캇따의 환속을 두고 전개되는 세존과 박가와곳따라는 유행승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본경에서 수낙캇따는 자신이 환속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는데, 첫째는 세존께서 자신을 위해서 신통의 기적을 나투시지 않는다는 것과, 둘째는 세상의 기원(agga- ññā, 악간냐)을 천명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세존께서는 이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신통변화와 세상의 기원을 보이셨지만 수낙캇따는 그래도 환속을 하였다고 경은 말하고 있다.

이처럼 수낙캇따의 환속 사유는 신통과 세상의 기원이라고 하는 출가자가 추구하는 도닦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그는 신통이라는 비본질적인 관심과 세상의 기원이라고 하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견해의 문제 때문에 출가하였으니 환속은 불 보듯 뻔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불교의 근본입장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바른 견해[正見]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른 견해가 확립되지 않고 뒤뚱대면 그의 중노릇도 수행도 뒤뚱대게 마련이다. 그래서 환속은 불 보듯 뻔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본경이 세존과 박가와곳따라는 유행승이 수낙캇따의 환속을 두고 나눈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경의 제목이「빠띠까 경」인 이유는 신통변화로 세존께 도전을 한, 나체 수행자 빠띠까뿟따에 대한 세존의 대처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통변화는 세속인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면서 외도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빠띠까는 신통변화로 세존께 도전장을 던지지만 세존의 단호한 대처에 겁을 먹고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른다. 물론 세존은 필요할 때 적지 않게 신통을 나투신 것으로 경들에 나타난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근본적으로 신통변화를 비롯한 인간을 넘어선 법(uttarimanussa-dhamma)을 재가자들에게 드러내지 말 것을 비구계목 안에 포함시키셨다. 율장의 해당 부분의 설명이 보여주듯이 비구계목(구족계) 속에 신통변화를 나투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나타난다는 말은 세존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비구들이 신통을 나툴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런 신통이 승가에게 불편함을 주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⑵「우둠바리까 사자후경」(Udumbarikasīhanāda Sutta, D25)

출가의 목표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서 출가하는가? 천상에 태어나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인가? 신통력을 구족하기 위해서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꽃다운 젊은 나이에 세속의 모든 것을 팽개치고 출가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본경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외도들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그것도 최고로 잡아서 범천에 태어나는 것으로, 그리고 5신통을 구족하는 것 정도로 출가의 최고 목표를 삼고 장부의 일대사로 삼는다. 세존께서는 그런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시는 것은 아니다. 나무로 치면 그런 것도 지저깨비는 되고 겉껍질 정도는 된다고 하신다. 그러나 출가의 핵심, 출가의 골수, 출가의 심재(心材)는 되지 못한다. 출가의 심재는 구경(究竟)의 지혜를 구족하여 지금여기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본경은 우둠바리까 왕비가 기증한 니그로다 유행승의 원림에서 세존과 니그로다 사이의 대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그로다 유행승이 세존을 비난하자 세존이 가셔서 그들이 최상으로 여기는 고행을 통한 금욕을 주제로 하여 타심통까지 설하신 뒤, 청정범행의 완성에 대해서 설하려 하셨지만 그들은 멍청히 있을 뿐 질문하지 않았다. 이 경을 통해서 고행을 위주로 하는 수행과 부처님 가르침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계신다.

그러므로 본경을 통해서 우리는 번뇌가 다 해소된 해탈․열반의 경지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나 신통을 구족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수승한 것이며, 출격장부의 입지를 가지지 않은 자들은 팔정도를 실천하여 최상의 지혜를 완성하고 해탈․열반의 실현을 이해조차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니그로다여, 이처럼 나는 상좌로 만들 욕심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대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생계 수단으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대들의 법들은 해로운 것이요 스승들의 전통에 있는 것들도 해로운 것이라 불리니, 그런 법들에 그대들이 굳게 서게 하려고 나는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대들의 법들은 유익한 것이요 스승들의 전통에 있는 것들도 유익한 것이라 불리니, 그런 법들로부터 그대들이 멀어지게 하려고 나는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니그로다여, 오염원이요 재생으로 인도하고 걱정거리요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며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가져오는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지 못한 채로 있다면, 그런 것을 제거하도록 나는 법을 설한다. 그대들이 그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원인 법들은 제거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은 증장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서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간곡히 말씀하신다.(§23)

그러나 유행승들은 단 한 명도 ‘오, 참으로 우리는 구경의 지혜를 얻도록 사문 고따마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도록 하자.’고 말할 엄두조차도 내지 못한다. 참으로 출격장부의 길은 일대사인연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것인가?

 

⑶「전륜성왕 사자후경」(Cakkavattisīhanāda Sutta, D26)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 했던가. 우리의 선조들도 천자문을 통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광활한 우주를 가르치려고 하였다. 도대체 우주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도대체 생명의 기원은 언제부터인가? 생명은 어떤 절대자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가? 인류의 대 스승이신 세존께서도 이런 물음에 대답을 하시지 않으면 안된다. 본경과 다음의「세기경」(D27)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인간의 기원과 수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본경에서는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가는 유장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타락하여 수명이 줄어들고, 인간들이 어떻게 다시 마음을 다잡아 향상하여 수명이 증장하는가를 달하네미라는 전륜성왕과 그의 후손인 왕들의 일화로부터 시작해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도도한 인간의 삶의 흐름에 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법(dhamma)이다. 법을 따를 때 인간은 증장하고 법을 거스를 때 인간은 타락한다. 그러면 그 법이란 무엇인가? 제일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법으로 본경에서는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을 금함과 열 가지 유익한 업의 길[十善業道]을 실천하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인륜 도덕을 무시하고 이를 예사롭지 않게 여길 때 이 우주의 질서도 같이 퇴보하고 타락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본경을 통해서 밝히고 계신다.

물론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인륜도덕에만 머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경의 시작과 끝에서 세존께서는 담담하게 “자신을 섬(혹은 등불)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 법을 섬(등불)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라[自燈明 自歸依, 法燈明 法歸依]”고 말씀하시고 그 방법으로 몸․느낌․마음․심리현상[身․受․心․法]에 대한 마음챙김을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경의 마지막에 인간의 수명이 8만 살이 될 때 미륵 부처님이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이런 광활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인 중생의 흐름에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궁극적인 의지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챙기는 공부(sati)뿐이다. 이것이 본경에서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전하는 가장 귀중한 메시지이다.

 

⑷「세기경」(世紀經, Aggañña Sutta, D27)

불교는 생명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설명할 수 없는 사실[無記]이라고만 말하고 넘어가버리는가? 부처님은 여기에 대해서 전혀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말씀을 하셨다. 그것이 바로 본경이다. 본경은 본격적으로 생명의 기원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세상의 기원[世紀]이라는 경의 제목이 나타내듯이 본경은 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어 가는가 하는 주제를 다룬 것이다. 초기경의 도처에서 세존께서는 태초의 개념을 부정하신다. 그래서 세존께서는『상응부』『시작 없음의 상응』(S15) 등에서 “비구들이여, 시작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윤회(saṁsāra)이니 처음 시작점은 알려지지 않는다.”(S.ii. 178 등)라고 하셨다. 세상의 기원을 설하시는 본경도 마찬가지다.

본경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세상의 기원이라고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이전이라고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태초니 최초니 하는 하나의 고정된 시점은 부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경에서 우주의 전개에 대한 설명도 사마야(samaya)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우주가 팽창하는 특정한 어떤 하나의 시점(samaya)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특정 시점은 다시 그 이전의 조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시무종으로 세상의 기원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어떻게 끄샤뜨리야, 바라문, 와이샤, 수드라의 네 집단과 사문 집단이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신 뒤, 이들은 모두 “중생들로부터 생겨났으며 다른 것들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자들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다른 자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비법(非法)에 의해서가 아니다. 와셋타여, 왜냐하면 지금여기에서도 내세에서도 법이 이 세상에서 최상이기 때문이다.”라고 매 단락에서 분명히 밝히신다. 이들은 결코 범천이나 어떤 다른 절대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경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菩提分法]들을 닦아서 지금여기에서 [오염원들을] 완전히 적멸하게 하여 열반을 얻는 그러한 아라한이야말로, 네 계급 가운데 어디 출신이든 제일이라고 부른다고 결론짓고 있다.

 

⑸「확신경」(確信經, Sampasādanīya Sutta, D28)

세존의 제자가 되려는 자든 이미 세존의 제자가 된 자든, 그가 세존의 출가한 제자든 아니면 재가에 있는 제자든, 누구나 스스로를 부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당연히 세존께 대한 절대적인 확신과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한다. 그것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나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불제자는 세존께 대한 어떤 확신을 가져야 하고, 어떤 절대적인 신뢰를 가져야하는가? 세존의 제자 된 우리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직계 제자들 가운데서도 법의 대장군이라 불리었으며 상수제자로 인정받던 사리뿟따 존자는 부처님께 대해 어떠한 확신과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던가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의 우리 불제자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출가자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본경이 전승되어 우리가 가져야 할 세존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들려주고 있다.

이 경의 첫 부분(§§1~2)은 이미 본서 제2권「대반열반경」(D16)의 §§ 1.16~17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 본경은 사리뿟따 존자가 입적하기 얼마 전에 세존을 만나서 세존의 면전에서 세존께 대한 자신의 믿음과 확신을 표한 것을 상세하게 기록한 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존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과 신뢰를 표하고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보다 먼저 반열반하였다. 아마도 그는 세존께 대한 믿음과 존경이 너무도 커서, 입적하시는 세존을 뵙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세존보다 먼저 입적을 하였을 것이리라. 본경에서 사리뿟따 존자가 확신에 차서 천명한 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묻기를, 왜 그대는 오직 세존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가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 세존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과거나 미래의 부처님들이나 나와 동등할까 그 외는 어느 누구도 나와 동등한 자란 없다고 하셨고, 또 하나의 세계에 두 사람의 정등각이 동시에 출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에서는 오직 우리 세존만이 가장 수승하신 분이시다. 그러니 내가 이런 세존만을 인정하고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본경 §20의 주해에서 인용)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어느 절대자에게도 바칠 수 없는 최고의 확신과 신뢰를 부처님께 바치고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 불자들은 과연 부처님을 향해서 사리뿟따 존자와 같은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⑹「정신경」(淨信經, Pāsādika Sutta, D29)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군사부일체라 하였으며 인도 바라문 전통에서도 스승은 부모 이상으로 중시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스승과 제자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무엇일까? 만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속된 말로 파투(破鬪)가 난다면 그 잘못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 후반기에 니간타의 지도자였던 나따뿟따가 임종하였다. 그가 임종하자 니간타는 극심한 분열을 맞게 되었다. 이건 불교 교단에서도 타산지석이 될 중요한 사건이었다. 특히 데와닷다의 분열을 경험한 뒤라서 더욱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본서「합송경」(D33)은 이러한 소식을 접한 사리뿟따 존자가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수별로 정리해서 설하는 것이다.

니간타의 분열에 관한 소식을 쭌다 사미로부터 전해들은 세존께서는 본「정신경」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엄밀하게 살펴보시면서 그것을 불교 교단에 적용하여 말씀하시고 당부하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가르침과 불교 교단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하고 계신가하는 점이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가 한 점 오점이 없는 스승이라는 확실한 입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며, 아울러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불교 교단에는 여러 단계에 머물고 있는 수많은 제자들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훌륭한 교단이 갖추어야 할 구비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단언하신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불법에 대한 여러 가지를 길게 말씀하신 뒤, “쭌다여, 이러한 과거에 대한 견해의 국집들과 이러한 미래에 대한 견해의 국집들을 제거하고 뛰어넘기 위해서 나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가르치고 천명하였다.”라고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당부하시면서 긴 말씀을 마치신다.(§40)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는 부처님 말씀의 핵심이다. 니간타 나따뿟따의 임종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설하기 시작하신 길고 간곡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챙김의 확립으로 이제 귀결이 되고 있다. 지금여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身․受․心․法]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에 속거나 계박(繫縛)되는 것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천명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본경의 제목인 청정한 믿음은 마음챙기는 공부를 할 때 실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본서의 도처에서 마음챙김이야말로 가장 요긴한 부처님의 말씀임을 보았다. 특히 본서 제2권「대반열반경」에서는(D16 §2.12, §2.26 등)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야말로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을 실천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계시며,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인 불방일(appamāda)도 주석서에서는 마음챙김의 현전(sati-avippāvasa) 혹은 지혜를 수반한 마음챙김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본서 제2권「대반열반경」(D16) §6.7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러므로 아지랑이와도 같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존재론적인 실체를 찾아 귀중한 시간을 다 허비할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몸, 느낌, 마음, 법으로 해체해서 꿰뚫어 보는 마음챙김을 매순간 닦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처님 제자라 할 것이며, 부처님께 대한 청정한 믿음을 낸 사람이라 할 것이다.

 

⑺「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 Lakkhaṇa Sutta, D30)

불교 경전의 도처에 부처님이나 전륜성왕은 32가지 대인상을 갖추었다고 나타난다. 본서 제1권의「암밧타 경」(D3) 등『디가 니까야』의 많은 경들에서도 대인상은 언급이 되고 있다. 그리고 본서 제2권「대전기경」(D14) §1.32는 32가지 대인상을 나열하고 있다. 이처럼 32가지 대인상을 나열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지만(M91) 정작 32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경은 없다. 빠알리 니까야들 가운데서 32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은 아마 본경뿐일 것이다.

본경은 32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무슨 이유 때문에 부처님이나 전륜성왕은 이러한 32상을 구족하게 되었는지를 전생에 닦은 공덕과 연결해서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32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이러한 32상을 어떻게 해서 구족하게 되는지를 알고자 하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삼십이상경」으로 옮긴 빠알리 원어는 Lakkhaṇa Sutta이다. 그러므로 ‘상경(相經)’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그런데 lakkhaṇa도 초기경들에서는 여러 의미로 나타나고 있고, 한역에 나타나는 相이라는 단어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본경의 주제를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삼십이상경」으로 구체적으로 옮겼다. 한역『장아함』에는 본경처럼 32상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경은 없고,『중아함』의 59번째에「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으로 번역된 경이 있다. 그러나『중아함』「삼십이상경」은 본경처럼 32상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고 있으며, 단지 32상의 나열만이 나타나고 있다.

 

⑻「교계 싱갈라 경」(Siṅgālovāda Sutta, D31)

초기경들을 결집한 분들은 모두가 출가한 비구들이었고, 게다가 모두 장부일대사를 해결한 아라한들이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분들이 모은 경들은 장부일대사를 해결하는 가르침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분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이런 해탈도의 가르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재가자들의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들은 경우도 적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들에서 재가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윤리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경들은 드물 수밖에 없다.

본경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특색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경이다. 본경은 재가 불자가 어떻게 불교적인 윤리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영위해야 하는가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재가자들의 삶을 다룬 경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경전이다.

 

재가자는 재가자의 삶의 도리를 다하여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들에게는 항상 보시와 지계와 천상에 태어남[施․戒․生天]에 관한 법문부터 먼저 하신 뒤에 그들의 근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이 되시면 “모든 부처님들께서 찾아내신 괴로움[苦]과 일어남[集]과 소멸[滅]과 도[道]라는 법의 가르침을 드러내신다.”(본서 제1권「암밧타 경」(D3) §2.21 참조)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본경에서도 보시와 지계로 요약할 수 있는 재가자의 삶의 덕목을 여러 측면에서 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경의 내용은 소위 말하는 선진국에서 국민이 함양해야 할 덕목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봉사하는 삶(보시)과 건전한 삶(지계)과도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이요, 그래서 현대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귀중한 재가자의 삶의 방식이다.

 

⑼「아따나띠야 경」(Āṭānāṭiya Sutta, D32)

우리의 오관의 영역을 넘어서고 일상적인 사고의 범위를 넘어선 소위 말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심령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기록은 아주 많다. 물론 이것은 현대 유물론적 관점으로 볼 때 인정할 수 없다고 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런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서 인간들을 괴롭힌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할까? 당하지 않는 사람에게야 대수롭지 않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중요하고 급한 생존의 문제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초기경은 이런 현상에 대한 대처로 보호주를 설하고 있다. 본경은 초기경에 나타나는 몇 가지 보호주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보호주로 옮긴 원어는 빠릿따(paritta)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질병이나 악령의 해코지나 다른 여러 위험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을 뜻한다. 그래서 호주(護呪)라 옮겨지는 술어이다. 빠릿따는 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5부 니까야에 나타나는 경들인데 보호를 목적으로 독송되고 있기 때문에 빠릿따라 불리는 것이다. 보호주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경 §2의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우리는 아따나따 보호주를 통해서 많은 신들과 특히 사대왕천에 속하는 많은 신들의 이름을 알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불법을 보호하고, 불법을 따라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보호하고, 불법에 귀의한 신도들을 보호하는, 말 그대로 호법선신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독송하는 대비주나 능엄주에 익숙한 분들은 대비주와 능엄주에, 특히 능엄주에 수많은 신들과 비(非)인간들이 나타나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따나따 보호주도 능엄주와 같은 성격의 비밀주라 할 수 있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보호주를 두고 신비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비불교적인 경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체계이면서도, 현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증장시키는 종교이기도 하다. 특히 재가자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뜨라나 다라니 독송을 통해서 자신과 가족과 재산과 영토의 보호와 행복의 증장을 바라는 인도종교 전통을 따라 사는 그 시대의 재가자들에게는 이러한 보호주의 독송이 어쩌면 삶의 안위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⑽「합송경」(合誦經, Saṅgīti Sutta, D33)

부처님 후반기에 니간타의 지도자였던 나따뿟따가 임종하였다. 그가 임종하자 니간타는 극심한 분열을 맞게 되었다. 이건 불교교단에서도 쉽게 넘길 수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불교교단도 데와닷다의 분열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정리하여, 교단 내에 부처님 가르침을 두고 이설과 분열이 횡행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각성이 직계제자들에게는 강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니간타의 분열은 특히 법의 대장군이라 불리던 사리뿟따 존자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결과로 나타난 경이 바로 본경이다. 본경은 니간타의 분열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사리뿟따 존자가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숫자[法數]별로 정리해서 설한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를 비롯한 직계제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보존하여 후대로 전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본경의 제목은 Saṅgīti Sutta이다. 여기서 saṅgīti는 saṁ(함께)+√gai(to sing)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함께 노래한 것, 함께 외운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보통 일차결집이니 이차결집이니 하면서 결집(結集)이라고 옮긴 단어가 바로 saṅgīti이다. 이러한 결집은 문헌을 모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들어서 알고 있던 것을 함께 노래해서 가사와 운율을 결정한 다음 이를 다시 함께 노래해서 서로 공유한 일종의 합창대회였기 때문에 역자는 ‘함께 노래함’이라는 원의미를 살려서「합송경」(合誦經)이라고 옮겼다. 중국에서는「중집경」(衆集經)으로 한역되어『장아함』의 9번째에 포함되어 있는데 saṅgīti를 중집(衆集)으로 이해하였다.

 

본경은 사리뿟따 존자가 1에 관계된 법들부터 시작해서 10에 관계된 법들까지 모두 230가지의 부처님 가르침을 정리해서 비구들에게 설한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본경에서 사리뿟따 존자가 법수별로 정리하고 있는 것을 그 숫자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에 관계된 법(§1.8) - 2가지

2에 관계된 법(§1.9) - 33가지

3에 관계된 법(§1.10) - 60가지

4에 관계된 법(§1.11) - 50가지

5에 관계된 법(§2.1) - 26가지

6에 관계된 법(§2.2) - 22가지

7에 관계된 법(§2.3) - 14가지

8에 관계된 법(§3.1) - 11가지

9에 관계된 법(§3.2) - 6가지

10에 관계된 법(§3.3) - 6가지

합계: 230가지 법들이다.

 

⑾「십상경」(十上經, Dasuttara Sutta, D34)

본경도 부처님 가르침을 법수별로 체계적으로 모으려는 노력에서 탄생한 사리뿟따 존자의 작품이다. 부처님 말년에 가까워질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졌을 것이다. 이러한 많은 가르침을 어떻게 모아서 노래하고 기억하여 후대로 전승해 줄 것인가는 직계제자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방대한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모아서 전승시킬 것인가? 그것은 기존의 인도 종교의 전통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불교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인도의 여러 바라문 가문들은 각 가문이 속하는 문파에 따라서 베다 본집(本集, Saṁhitā)과 제의서(祭儀書, Brāhmaṇa)와 삼림서(森林書, Āraṇyaka)와 비의서(秘義書, Upaniṣad)를 모아서 노래의 형태로 전승해 오는 전통이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전체 10장(만달라, Maṇḍala)으로 구성되어 있는『리그베다』의 2장부터 7장까지는『리그베다』파에 속하는 바라문 가문들에서 전승되어 오는 찬미가를 각각 가문별로 모은 것이다. 예를 들면 본서 제1권「암밧타 경」(D3 §2.8)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명한 바라문 가문들 가운데 웻사미따(Sk. Viśvāmitra)는『리그베다』3장을 전승해온 가문의 이름이며, 와마데와(Sk. Vāmadeva)는 4장을, 바라드와자(Bharadvāja)는 6장을, 와셋타(Sk. Vasiṣṭha)는 7장을 전승해온 가문의 이름이다. 그리고 8장은 깐와와 앙기라스 두 가문의 전승을 모은 것이며 9장은 제사에서 아주 중요한 소마(Soma) 즙에 관계된 찬미가들을 모은 것이다. 여기에다 1장과 10장은 일종의 잡장인데 가문과 관계없는 시대적으로 늦은 찬미가들을 모아서 구성한 만달라이다.

그리고『리그베다』의 각 장은 모두 다시 주제별로 모아져 있는데 먼저 바라문들의 신인 아그니에 관계된 찬미가를 모으고, 다음은 인드라, 그 다음은 다른 여러 신들의 순서로 모았다. 이처럼 이미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바라문들은 체계적으로 그들의 찬미가를 모아서 노래로 전승하고 있었다.

음악을 구성하는 두 요소는 음정과 박자일 것이다. 그들은 음정으로는 우닷따(udātta, 고음), 아누닷따(anudātta, 저음), 스와리따(svarita, 굴리는[曲折] 음)라는 세 가지 음정을 사용하였고, 박자로는 짧고(hrasva), 길고(dīrgha), 빼는 세 가지 박자를 인정하였다. 이처럼 음정과 박자를 사용하여 베다를 정확하게 노래하여 후대로 계승해온 것이다.

그들은 베다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노래한 것만이 아니고 베다를 단어(pada)별로 끊어서 독송하는 방법도 개발하였고, 1 → 1,2 → 1,2,3 → 1,2,3,4 … 씩으로 각 어절을 처음부터 반복하는 식으로 각파에 속하는 베다를 독송하는 방법도 개발하였다. 기상천외하게『리그베다』를 제일 뒤에서부터 거꾸로 독송해 올라오는 방법까지 개발해 내었고 실제로 이렇게 독송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베다의 한 음절도 틀리지 않게 후대에 전승하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찬미가를 숫자별로 증가하는 방식으로 모으기도 하고, 숫자별로 감소하는 방식으로 모으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베다와 가르침을 결집하였다.

이 방식은 자이나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자이나의 앙가(Aṅga)들도 다양한 방법론으로 결집되어 전승되어 온다. 물론 정통 자이나교라고 자처하는 공의파(空衣派, Digambara)에서는 마하위라 혹은 나따뿟따의 가르침은 이미 자이나 교단 초기에 인도 중원에 큰 기근이 들어서 자이나 수행자들이 탁발을 쉽게 할 수 있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와중에 모두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려가지 않고 흰 옷을 입고 덜 엄한 고행으로 교단 체제를 바꾼 백의파(白衣派, Śvetāmbara)에서는 지금까지 그들이 전승해 오고 있는 앙가(Aṅga)들을 정전으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런 앙가들을 모두 마하위라나 초기 자이나 교단 수행자들의 가르침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아야랑가』(Āyaraṅga, Ācāraṅga Sūtra),『수야가당가』(Sūyagaḍaṅga, Sūtrakṛtaṅga Sūtra), 불교의『숫따니빠따』와 같은 성격을 가진『웃따라댜야나수뜨라』(Uttarādhyayana Sūtra) 등은 언어학적으로나 문헌학적으로도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여러 학자들이 공히 인정한다.

인도 종교계의 사정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불교교단도 부처님 말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방법론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특히 사리뿟따 존자와 깟사빠 존자와 같은 바라문 가문 출신들에게는 자연스런 추세였을 것이다.

 

가르침을 모으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본경은 그 가운데서도 조금 더 특이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 사리뿟따 존자는 본경에서 비구들이 받아 지니고 공부해야 할 주제를 ① 많은 것을 만드는 법 ② 닦아야 할 법 ③ 철저히 알아야 할 법 ④ 버려야 할 법 ⑤ 퇴보에 빠진 법 ⑥ 수승함에 동참하는 법 ⑦ 꿰뚫기 어려운 법 ⑧ 일어나게 해야 하는 법 ⑨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하는 법 ⑩ 실현해야 하는 법이라는 열 가지로 정리한다. 그런 다음 이 열 가지에 해당되는 법들을 각각 하나의 법수부터 시작해서 10까지 증가하면서 설한다. 그래서 경의 제목을 다사-웃따라(Dasa-uttara, 다숫따라, 열 가지를 하나씩 증가하며, 혹은 열까지 하나씩 증가하며)라고 붙였고 십상(十上)으로 한역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본경에서는 (1×10) + (2×10) + … + (10×10)하여 모두 550개의 가르침이 10가지 주제 하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설해지고 있다. 왜 사리뿟따 존자를 법의 대장군이라 부르는지를 알 수 있는 경이다.

 



디가 니까야 (長部, 길게 설하신 경) (1/2/3)

각묵 스님 옮김/신국판(양장)

제1권: 616쪽/ 제2권 600쪽/ 제3권: 688쪽

정가: 각권 30,000원 (초판 2006년, 3쇄 2010년)

* 제3회 보현학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