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가 니까야 <제1권 계온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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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계온품 목차
경번호
페이지
범망경-범천의 그물,견해의 그물D177
사문과경-출가의 결실D2183
암밧타 경-천한 사람, 고귀한 사람D3265
소나단다 경-진정한 바라문D4315
꾸따단따 경-참된 제사D5343
마할리 경-출가의 목적D6381
잘리야 경-생명과 몸은 같은가 다른가D7409
깟사빠 사자후경-고행과 사문의 본업D8417
뽓타빠다 경-인식의 문제, 자아의 문제D9451
수바경-부처님의 일대시교_계 정 혜D10505
께왓다 경-진정한 신통D11535
로힛짜 경-참된 스승, 나쁜 스승D12561
삼명경-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는 길D13
581




<디가 니까야 역자 서문>


1. 들어가는 말

'부처님께서 돌아가셨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ㅡ부처님의 직계 제자들이 아무리 아라한과를 증득하였거나 예류과 이상을 증득한 성자들이었다 할지라도 부처님의 입멸은 그분들에게 맑은 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자, 남은 제자들은 부처님의 입멸에 어떻게 대처해야할 것인가? 이것은 비단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적용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역자는 인도에 유학 중이었던 96년에 『디가 니까야』를 초역하면서 본서 제2권 「대반열반경」 (D16)의 부처님 입멸에 관한 부분을 번역하고서는 한동안 맥이 빠져 다음 경을 읽을 수가 없어 애를 먹었던 적이 있다. 그 뒤부터 '부처님께서 돌아가셨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는 것은 빠알리 삼장의 국역불사에 임하는 역자의 기본 마음가짐이 되었다.

 

 

2.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입멸 후에 겪게 될 제자들의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충분히 예견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이미 마지막 유훈으로 말씀해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유훈으로 다섯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이것과 관계된 것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 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대반열반경」(D16) §6.1)

 

부처님은 가셨다. 그러나 그분이 가르치고 천명하신 법(dhamma)과 율(vinaya)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부처님의 존체(尊體, sarīra, 舍利)요, 인류 만대의 진정한 스승이 될 것이다. 부처님의 직계 제자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마하깟사빠(대가섭) 존자를 수장으로 하여 세세생생 인류가 해탈 ·열반이라는 최고의 이상을 실현하도록 길잡이가 되고 진정한 스승이 될 법과 율을 함께 노래해서[合誦, saṅgīta] 진정한 부처님의 몸[法身, dhamma-kāya]을 이 땅 위에 구현해 내었다. 이를 후대 사람들은 일차합송(一次合誦, paṭhama-sañgīti) 혹은 일차결집(一次結集)이라 부른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일차합송을 완성하기까지 있었던 일화는 본서 제3권의 부록으로 번역 소개하고 있는 『장부 주석서』 서문에 잘 나타나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물론 이러한 합송 작업은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에 이미 충분한 기초를 다져두었다. 부처님께서는 29세에 출가하셔서 6년간 수행을 하셨고 35세에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하셨다. 그 뒤 45년간 인도 중원을 다니면서 설법하시고 사람들을 교화하시다가 80세에 꾸시나라의 한 쌍의 살라 나무 사이에서 반열반하셨다.( 「대반열반경」 (D16) §5.27 참조)

부처님이 깨달음을 증득하신 후 보내신 이 45년의 기간은 다시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의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기준은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給孤獨) 장자가 사왓티에 급고독원(給孤獨園)을 지어서 승가에 기증한 것이 된다. 세존께서는 성도 후 21년째 되던 해부터 급고독원에 머무셨는데 그 기간은 모두 19년이라고 한다.(본서 「뿟타빠다 경」(D9) §1의 주해 참조) 사왓티의 동원림(東園林) 녹자모 강당(본서 제3권 「세기경」 (D27) §1의 주해 참조)에 머무신 것을 합치면 세존께서는 사왓티에만 24년을 머무셨다고 한다. 물론 해제 때에는 유행(遊行)을 하셨을 것이다. 녹자모 강당이 완공된 후에는 낮에는 녹자모 강당에 머무시고 밤에는 급고독원에 머무시는 등으로 번갈아가면서 계시기도 하였다고 한다. 세존께서 아난다 존자를 시자로 삼으신 것도 여기 계시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사로 본다면 세존께서 45년 간 설법하신 기간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특히 말년을 이곳 한 군데서 머무셨다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존께서는 성도 후 21년째 되던 해부터 43년이 되던 해까지 24년을 이곳 사왓티에서 머무셨다고 하는데 세존이 성도하실 무렵을 35세 정도로 본다면 기원정사에 머물기 시작하실 때가 57세쯤이고 환갑이 되실 연세셨다.

많은 초기불교 경들이 이 기원정사에서 설해진 것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중부』 와 『상응부』경들은 반에 가까운 정도가 이곳에서 설해졌다. 『상응부』 경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주제별로 모아서(saṁyutta) 교리의 체계화에 중점을 둔 짧은 경들이고, 『중부』가 특히 비구들에게 중점적으로 법을 설하신 경들을 모은 것이라고 본다면 참으로 세존께서는 말년에 사리뿟따(사리불)와 목갈라나(목련)와 깟짜야나(가전연) 등의 큰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서 법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셨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해서 뛰어난 암기력을 가졌으며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의 시자로 지명이 되어 부처님이 반열반하실 때까지 대략 25년 동안을 시자로 있었는데 이 또한 우연은 결코 아닐 것이다.

즉 깨달으신 후 세존의 45년 간의 삶 가운데서 전반부 20여 년은 법의 전도에 역점을 두셨다면 나머지 20여 년은 부처님과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하며, 그래서 부처님과는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였다고 하는, 부처님의 가장 유력한 후원자였던 빠세나디 꼬살라 왕이 통치하는 사왓티의 기원정사와 녹자모 강당에 머무시면서, 사리뿟따 존자를 위시한 제자들과 교법을 체계화하여 불법대계(佛法大計)를 도모하셨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여 년이 넘는 이러한 법체계화의 큰 초석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두 달 뒤에 가진1) 일차합송은 별다른 무리 없이 7개월 만에 무난히 회향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서 제3권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합송경」(D33)과 십상경」 (D34)을 통해서도 부처님 재세 시에 이미 부처님 법에 대한 세밀한 분류가 진행되어 대중들이 함께 노래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두 개의 경은 부처님의 상수제자요 법의 대장군이라 불리던 사리뿟따 존자에 의해서 설해진 경인데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을 향해서 가진 확고부동한 믿음은 본서 제3권 「확신경」 (D28)에 멋지게 표현되어 있다. 어찌 사리뿟따 존자만이 세존에 대한 이러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겠는가? 부처님의 직계제자들은 모두 다 세존께 대한 부동의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존이 입멸하신 뒤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결집하는 일이라고 서로 완전히 공감을 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장장 일곱 달 동안 합송에 매달려서 세존이 남기신 법과 율을 결집하였던 것이다.

 

 

3. 법과 율의 합송

 부처님께서는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법의 바구니(Dhamma-Pitaka = Sutta-Pitaka, 經藏)와 율의 바구니(Vinaya-Pitaka, 律藏)라는 두 개의 바구니를 먼저 설정하였다. 그 가운데서 율의 바구니부터 먼저 채우기로 결의하였는데 합송에 참석한 아라한들은 "마하깟사빠 존자시여, 율은 부처님 교법의 생명(āyu)입니다. 율이 확립될 때 교법도 확립됩니다. 그러므로 율을 첫 번째로 합송해야 합니다."2)라고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법의 바구니를 채우기 시작하였는데 법의 바구니는 다시 다섯 개의 부분(Nikāya)으로 나누어서 합송하였다. 길게 설하신 가르침은 『디가 니까야』(長部)에, 중간 길이로 설하신 가르침은 『맛지마 니까야』(中部)에, 주제별로 모은 가르침은 『상윳따 니까야』(相應部)에, 숫자[法數]별로 모은 가르침은 『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에 합창으로 노래를 불러 채워 넣었다. 법과 율을 율장과 경장과 논장의 삼장(三藏, Ti-pitaka)으로 조직한 상세한 내용은 본서 제3권의 부록으로 번역 소개하고 있는 『장부 주석서』 서문의 §§30~48에 잘 나타나 있으니 참조하기바란다. 이 부분은 상좌부 전통에서 본 삼장의 조직체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에 역자의 보충 설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역자가 여기서 합송을 노래라고 자꾸 표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노래는 한 번 가사와 운율이 정해져서 대중화가 되고난 후에 누군가가 틀리게 부르면 바로 잘못 노래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노래의 중요성이다. 역자는 지금도 학창시절에 즐겨 부르던 어니언스의 '편지'를 누가 부르면, 틀렸는지 옳게 불렀는지 가사와 음정과 박자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이처럼 일단 합송을 거쳐서 함께 노래되어 공인된 경들은 누가 잘못 노래하면 그 즉시 알아챌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합송하여 공인된 『디가 니까야』(장부)는 아난다 존자의 제자들에게 부촉해서 그분들이 계승해 가도록 하였으며, 『맛지마 니까야』 (중부)는 사리뿟따 존자의 제자들에게, 『상윳따 니까야』(상응부)는 마하깟사빠 존자의 제자들에게, 『앙굿따라 니까야』(증지부)는 아누룻다 존자의 제자들에게 각각 부촉해서 전승하도록 하였다 한다.3)

 

불교 역사를 살펴보면 아난다 존자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DPPN에 의하면 그는 부처님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하며,4)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태어나서(아누룻다 존자와 마하나마와는 형제 혹은 이복형제였음) 부처님께서 성도 후 2년 뒤에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셨을 때 아누룻다, 데와닷다 등 다른 사까의 청년들과 함께 출가하였고, 세존께서 성도하신지 20년쯤 뒤부터 부처님 시자의 소임을 맡아서 부처님이 입멸하실 때까지 25년(Thag.1039)을 그림자처럼 한결같이 곁에서 모셨고, 세존이 하신 설법을 기억하여 일차합송에서 부처님 말씀을 경장으로 확정짓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주석서들에 의하면 그가 임석하지 않아서 듣지 못한 가르침은 개인적으로 부처님께 여쭈어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빼놓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는 너무 오래 부처님을 모셨기 때문에 부처님 입멸 후에 승단의 일부 스님들로부터 10가지 문제 때문에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의 역할은 일차합송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초기교단에서도 장수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법구경 주석서』 등에 의하면 아난다 존자는 무려 12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DhpA.99)5) 그러므로 그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에도 무려 40년을 더 생존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만일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과 같은 연배가 아니라 10년 이상 더 늦게 태어났다면 부처님 입멸 후 그의 생존 기간은 50년 이상으로 더 늘어난다. 부처님의 직계제자가, 그것도 부처님을 25여 년간 시봉했었던 사람이, 그것도 부처님의 사촌으로 같은 언어와 같은 사유체계와 같은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하여 경장으로 결집해 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사람이 부처님 입멸 뒤에 40년을 더 생존했다는 것은 초기불교의 교단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이론(異論)이나 이설(異說)이 끼어들 여지를 최대로 줄이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불교 교단은 사리뿟따와 같은 대천재를 통해서 일찍부터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결집하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마하깟사빠 존자와 같은 보수적인 인물을 통해서 부처님 입멸 후에 부처님 말씀을 결집해 내는 성과를 거두게 되어 동요 없이 교단이 안정되고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아난다 존자와 같은 부처님 직설(直説)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요 부처님 입적 후에도 적어도 40년을 더 생존한 분에 의해서 교단과 교법은 인류 역사의 흐름과 함께 할 기틀을 완전하게 닦은 것이다.

 

 

4. 『디가 니까야』 의 구성

 『디가 니까야』 는 이처럼 부처님 직설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가졌던 아난다 존자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노래해서 후대로 전승시킨 부처님 말씀들이다. 아난다 존자가 가진 이러한 권위를 일차합송에 참석한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두 인정했기 때문에 그는 니까야 가운데서도 제일 처음이 되는 『디가 니까야』 를 전승할 책임을 맡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자연스럽게 가능하다.

『디가 니까야』 는 길게 설하신 경들을 모은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장부』 (長部)라고 옮겼고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이처럼 『디가 니까야』를 결집한 기본 기준은 오직 "길다"는 것뿐이다. 길게 설하신 것이라는 이 기준으로 모아서 『디가 니까야』 에 포함된 경들은 모두 34개이다. 이 34개의 경들은 다시 『계온품』과 『대품』과 『빠띠까 품』 으로 불리는 세 개의 품으로 니누어져서 전승되어 온다. 첫 번째인 『계온품』에는 13개의 경들이 포함되어 있고, 두 번째인 『대품』에는 10개의 경들이, 세 번째인 『빠띠까 품』에는 나머지 11개의 경들이 포함되어 있다.

역자가 전체 3권으로 옮긴 본서는 『디가 니까야』 의 각 품을 각 권으로 하여 출판하고 있는 PTS본을 위시한 각 나라의 판본을 따라서 『계온품」 을 제1권으로, 『대품』을 제2권으로, 『빠띠까 품』을 제3권으로 번역 ·출간한 것이다. 이 각 품의 명칭 등에 대한 설명은 해당하는 권의 해제를 참조하기 바란다.

 

『디가 니까야』 34개의 경을 정리해 보면 다음의 도표와 같다. 도표에 나타난 내용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경을 설한 곳으로는 마가다가 열네 번, 꼬살라가 열 번, 삭까가 두 번, 꾸루가 두 번, 짬빠가 두 번, 말라가 두 번, 그리고 웨살리와 왐사(꼬삼비)가 각각 한 번씩 나타난다.

그리고 경을 설한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28개의 경이 세존이 설하신 것이고, 사리뿟따 존자가 세 군데, 아난다 존자가 한 군데, 꾸마라 깟사빠 존자가 한 군데, 그리고 신들이 한 군데(빤짜시카 간답바)이다.


번호

설법처

설법자

청법자

비고

1

 

 

 

범망경

마가다

세존

비구대중

비구

2

사문과경

마가다

세존

아자따

3

암밧타경

꼬살라

세존

암밧타

바라문

4

소나난다경

짬빠

세존

소나난다

바라문

5

꾸따단따경

마가다

세존

꾸따단따

바라문

6

마할리 경

웨살리

세존

마할리

태수

7

잘리야 경

꼬삼비

세존

잘리야 외

외도

8

깟사빠 사. 경

꼬살라

세존

깟사빠

외도

9

뽓타빠다 경

꼬살라

세존

뽓타빠다

외도

10

수바 경

꼬살라

아난다

수바

바라문

11

께왓다 경

마가다

세존

께왓다

장자

12

로힛짜 경

꼬살라

세존

로힛짜

바라문

13

삼명경

꼬살라

세존

와셋타 외

바라문

14

 

 

대전기경

꼬살라

세존

비구대중

비구

15

대인연경

꾸루

세존

비구대중

비구

16

대반열반경

마가다

세존

비구대중

비구

17

마하수닷사나경

마가다

세존

아난다

비구

18

자나와사바경

마가다

세존

아난다

비구

19

마하고윈다경

마가다

빤짜시카

세존

세존

20

대회경

삭까

세존

비구대중

비구

21

제석문경

마가다

세존

삭까

22

대념처경

꾸루

세존

비구대중

비구

23

빠야시 경

꼬살라

꾸.사빠

빠야시

태수

24

빠띠까 경

말라

세존

박가와곳따

외도

25

우둠. 사. 경

마가다

세존

니그로다

외도

26

전륜성왕사.경

마가다

세존

비구대중

비구

27

세기경

꼬살라

세존

와셋타 외

바라문

28

확신경

마가다

사리뿟따

세존

세존

29

정신경

삭까

세존

쭌다

비구

30

삼십이상경

꼬살라

세존

비구대중

비구

31

교계싱갈라 경

마가다

세존

싱갈라

장자

32

아따나띠야 경

마가다

세존

비구대중

비구

33

합송경

말라

사리뿟따

비구대중

비구

34

십상경

짬빠

사리뿟따

비구대중

비구

* 사. = 사자후, 우둠. = 우둠바리까, 꾸. = 꾸마라깟사빠


그리고 경을 들은 사람은 비구대중이나 비구가 14군데, 바라문이 7군데, 외도 수행자가5군데, 왕 혹은 태수가 세 군데, 장자가 두 군데, 신(삭까, 인드라)이 한 군데이고, 세존이 경을 들은 사람으로 나타나는 곳이 두 군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비구들이 청법자(聽法者)가 된 곳은 『대품』이 일곱 군데고, 『빠띠까 품』이 여섯 군데인 반면, 제1품인 『계온품』에는 오직 한번뿐이다. 바라문들은 『계온품』의 다수 청법자들이되는데 『계온품』에만 여섯 군데가 되고, 나머지는 『빠띠까 품』의 「세기경」 뿐인데 「세기경」에서 이미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라는 두 바라문 학도는 비구승단에서 비구가 되기 위한 견습 기간을 가지는 중이었으므로 꼭 바라문 신분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단계였다.

그리고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바로 외도 수행자(유행승과 나체 수행자 등)들이다. 『디가 니까야』의 다섯 개의 경들이 세존께서 이들 외도 수행자들에게 하신 법문인데 모두 상당한 수준의 법문들이며, 불교와 외도의 가르침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 수행자들이 외도들이 가지는 이러한 견해에 붙들려 있지는 않은지 반드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잘리야 경」 (D7), 「깟사빠 사자후경」 (D8), 「뿟타빠다 경」(D9), 「빠띠까 경」(D24), 「우둠바리까 사자후경」 (D25)은 외도 사문들의 주장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대비해 볼 수 있는 경들이기에 깊이 음미해 보기 바라는 마음간절하다.

이제 『디가 니까야』 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적어보는 것으로 역자 서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5. 『디가 니까야』의 특징

 (1) 대기설법

경장(經藏, Sutta Pitaka)에서 전승되어 오는 부처님 말씀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일까? 논장의 주석서들은 주저하지 않고 경장에 전승되어 오는 부처님의 말씀은 대기설(對機說, pariyāya-desanā)이라고 적고 있다.6) 그래서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대기설법이란 문자 그대로 '듣는 사람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하신 설법'이라는 뜻이다. 이 대기설[법]에 해당하는 원어 pariyāya-desanā 가운데 pariyāya는 pari(둘레에, 원만히)+√i(to go)에서 파생된 명사로, 기본 의미는 '일이 경우에 맞게 원만히 잘 되어 가는 것'을 뜻하며, 그런 의미에서 '방편, 방법, 순서, 차례, 습관' 등의 의미로 쓰인다. 부처님의 말씀은 항상 듣는 사람의 이해 정도나 여러 여건에 따라 적절하게 설해지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특히 dhamma와 합성되어 dhamma-pariyāya라는 단어는 초기경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술어인데 문자 그대로 '법을 [설하신] 방법, 차례'라는 뜻이며 한역에서 '법에 들어가는 문'으로 이해해서 법문(法門)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절집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본서의 여러 경들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 법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주로 재가자들)에게는 보시와 지계와 천상에 나는 것[施 ·戒 ·生]을 설하셨고, 법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다양하게 법을 설하셨다. 그리고 같은 내용도 상황에 따라서 사성제로 설하시기도 하고 팔정도로 설하시기도 하고 12연기로 설하시기도 하고 무아를 강조해서 설하시기도 하며, 수행에 관계된 말씀도 어떤 때는 오근/오력으로 설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칠각지를 강조해서 설하시기도 하고 사념처를 강조하기도 하고 37보리분법 전체를 설하시기도 한다. 그 외에도 많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처한 상황이나 문제의식이나 이해 정도나 수행 정도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설법을 하셨다. 이런 것을 우리는 대기설법이라 한다. 반면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에서는 이러한 특징을 가진 경장과 비교해서 논장의 가르침은 비대기설(非對機說,nippariyāya-desanā) 혹은 비방편설(非方便説)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서문 §3을 참조하기 바란다.

따라서 대기설법은 『디가 니까야』 만의 특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대기설법은 모든 부처님의 말씀, 특히 경장에 전승되어 오는 가르침 전체를 특징짓는 술어이다. 그러나 역자가 『디가 니까야』 의 특징을 정리하면서 제일 먼저 대기설법을 언급하는 것은 『디가 니까야』 가 특히 대기설법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부처님말씀이 대기설 혹은 방편설이라는 이 가장 중요한 전제를 망각해 버리면 『디가 니까야』 는 자칫 큰 혼란과 오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디가 니까야』 에는 많은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타나고 특히 인도에서 아주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는 베다와 제사와 고행에 관한 대화가 많이 실려 있다. 대기설법이라는 방법론을 잊어버리고 이런 신화화되고 인도에 토착화된 말씀들을 인도와는 전혀 다른 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그것도 과학의 시대에 IT 강국이라는 현대의 한국에 사는 우리의 시각으로만 『디가 니까야』 를 판단하게 되면, 자칫 부처님이 그 시대의 인도사회를 통해서 인류 전체에게 주시고자 한 메시지를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대기설법이라는 경장 전체의 특징을 가져와서 『디가 니까야』 의 가장 큰 특징으로 먼저 들고 있는 것이다.

 

(2) 대화의 정수

『디가 니까야』 는 가히 대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대화는 듣는 사람의 기틀을 먼저 생각하는 대기설법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대화는 비단 『디가 니까야』 뿐만 아니라 대기설법을 전개하는 다른 니까야들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특징이다. 그러나 『디가 니까야』 는 더욱더 대화를 중시하는 경들로 구성되어 있다.

『디가 니까야』 34개의 경들 가운데서 대화가 없이 부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직접 비구대중에게 하시는 상단법문식의 가르침은 「대념처경」 (D22)과 「전륜성왕 사자후경」 (D26)과 「삼십이상경」 (D30)밖에 없다. 물론 사리뿟따 존자가 비구대중에게 행한 「합송경」 (D33)과 「십상경」 (D34)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예를 들면, 『맛지마 니까야』(중부)는 모두 152개의 경들 가운데 대략 47개 정도가 세존께서 비구대중에게 대화 없이 법을 설하시는 형태의 경이다.7) 이것은 드물게 사리뿟따 존자 등이 비구대중에게 대화없이 법을 설한 경우(M15, M28)도 포함시킨 숫자이다. 이처럼 『맛지마니까야』 를 구성하고 있는 거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경들이 대화의 형식이 아닌 상단법문식의 가르침이다. 『상응부』 도 경전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점검하기는 힘들지만 대략적으로만 살펴보아도 『중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단순한 비교만으로도 『장부』에 결집된 경들이 얼마나 대화를 중시하고 있는가 드러난다. 특히 당대 인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소나단다 바라문(D4)이나 꾸따단따 바라문(D5), 그리고 암밧타(D3)와 와셋타와 바라드와자(D13)로 대표되는 젊은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바라문 학도들과의 심도 깊은 담론은 가히 대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디가 니까야』 에서 부처님께서 전개해 가시는 대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진지하고 자상하시다. 연로한 바라문들(D4, D5)이나 왕(D2)이나 삭까와 같은 신(D21)에게는 참으로 고요하면서도 자상하게 대화를 하신다. 「교계 싱갈라 경」 (D31)에서는 세속적인 삶에 있어서 귀중한 것들을 모두 다 드러내 보여주시는 자상함이 있으시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신다. 세존께서는 연로한 소나단다 바라문이 세존과의 대화에서 실수할까 두려워하는 것을 아시고는 소나단다 바라문이 가장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것을 대화의 주제로 택하신다.(D4) 「우둠바리까 사자후경」 (D25)에서도 외도 수행자들이 자신 있게 대화할 수 있는 고행과 금욕을 대화 주제로 택하신다.

셋째, 무뢰한 자에게는 엄하고 단호하게 대하신다. 암밧타와 같은 무례하고 건방을 떠는 젊은 바라문에게는 강력하고 질풍노도와 같은 권위와 엄격함을 갖춘 대화를 하신다.(D3) 세존이 하시는 이적(異蹟)의 두 배를 해내겠노라고 지껄이던 나체수행자 빠띠까뿟따에게는 그런 견해를 버리지 않고 내 앞에 오면 "머리가 떨어질 것"이라고 지엄하게 말씀하신다.(D24)

넷째, 전하고자 하는 말씀을 분명하게 하신다. 논점을 흐리지 않으신다. 바라문만이 최고라는 당대의 억지 논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정한 기준과 논리를 제시하신다.(D3, D13, D27) 그리고 반드시 결론에 도달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로 천명하신다.

참으로 부처님이야말로 진정 대화를 할 줄 아는 분이시며, 대화로 상대방을 대자유의 세계로, 깨달음의 세계로,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리즈 데이빗교수는 100여 년 전에 이미 인류 최고의 스승임에 틀림없는 부처님이 자신의 가르침을 일방통행식으로 드러내지 않고 대화를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이 사실에 감격한 나머지 아예 『디가 니까야』를 "Dialogue of the Buddha"라는 제목을 붙여서 영역을 하였다. 역자도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이러한 부처님의 대화에 깊이 들어가서 부처님이 인도 동시대인들을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전하시고자 한 고구정녕한 메시지를 캐내어서 그분이 설하신 방법대로 진지하게 삶과 대면해서 지고의 행복[至福, parama-sukhal을 실현하시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3) 거대담론

역자는 『디가 니까야』 만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을 들라면 거대담론을 들고 싶다. 『장부』는 길게 설하신 가르침을 모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길다는 말을 단순히 그 길이가 길다는 것만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여기서 길다는 말은 거대담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주와 인간과 삶과 역사와 윤회에 대한 거대담론이 『디가 니까야』의 중요한 특징이다. 『중부』 와 『상응부』와『증지부』는 그 길이에 제한 받고 그 주제에 제한 받아서 거대담론을 펼치지 못하는 측면이 많다. 그러나 『장부』 는 일단 길이의 제한이 없으므로 특정 주제나 특정 사건을 놓고 여러 측면에서 상세한 분석과 설명과 해명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장부』 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래서 「사문과경」 (D2)에서는 출가자들이 출가수행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결실을 논하면서 육사외도(六師外道)로 표현되는 동시대 여섯 스승들의 사상을 살펴보고, 이어서 부처님이 가르치는 핵심을 계 ·정 ·혜에 초점을 맞추어 상세한 비유와 함께 23가지로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이는 출가란 무엇인가, 출가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출가의 결실은 무엇인가 하는 출가적 삶의 방식에 대한 거대담론이다. 여기서는 오직 불교식 출가만을 취급하지 않는다.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당대 인도의 출가자 즉 사문들의 가르침도 논의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모든 출가인들의 삶의 방식을 다루는 거대담론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그리고 칠불(七佛)의 유래와 위빳시불의 행적을 다룬 「대전기경」(D14)도 광대한 스케일의 불교 역사를 설하고 있다. 「대전기경」에 해당하는 『장부 주석서』는 이러한 「대전기경」 이야말로 경들의 왕(sutanta-rāja)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현존하는 「대전기경」 은 3바나와라 분량이지만 위빳시불의 행적을 칠불 모두의 행적으로 확장하면 21바나와라가 되고, 이를 설하는 자도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 다섯 정거천의 다섯 천신들을 포함시키면 모두 126바나와라 분량의 방대한 스케일[의 거대담론]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석서의 설명이다.

특히 「범망경」 (D1)에서는 인류가 가질 수 있는 견해를 과거에 관한것 18가지와 미래에 관한 것 44가지로 분류해서 상세하게 담론하고 있다. 인류가 가질 수 있는 견해는 사실 이 62가지를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이를 견해의 그물이라 부르고 범천의 그물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범망경」 이 단순히 인류가 가질 수 있는 견해들만 나열하고 있다면 이를 두고 거대담론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범망경」에는 견해에 대한 담론만이 있지 않다. 「범망경」 은 이러한 견해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연기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명명백백하게 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야말로 거대담론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륜성왕 사자후경」 (D26)과 「세기경」 (D27)은 우주의 수축과 팽창의 진행과정 속에서 함께 부침하는 인류의 타락과 향상의 역사를 담담하게 서술하면서, 인류가 어떻게 타락해가고, 어떻게 진지한 반성을 통해서 다시 향상해 가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인류의 수명이 8만 살이 되었을 때 전륜성왕이 다시 탄생하는 것과 메떼야(미륵)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것까지 참으로 거대한 담론을 전개하고 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도도한 인간의 삶의 흐름에는 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법(dhamma)이라고 강조하신다. 법을 따를 때 인간은 항상하고 법을 거스를 때 인간은 타락한다. 그러면 그 법이란 무엇인가? 제일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법으로 본경에서는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을 금함과 열 가지 유익한 업의 길[+善業道]을 실천하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인륜 도덕을 무시하고 이를 예사롭지 않게 여길 때 이 우주의 질서도 같이 퇴보하고 타락한다고 부처님께서는 이 경들을 통해서 밝히고 계신다. 물론 부처님 가르침이 이러한 인륜 도덕에만 머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륜성왕 사자후경」 (D26)은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로 결론을 맺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四念處]를 들고 계신다. 이것이 장대한 우주의 팽창 ·수축과 인간의 타락 ·향상을 대면하는 인류가 궁극적으로 의지할 곳이라고 결론지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반열반하시기 전해부터 시작하여 부처님의 입멸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하면서 부처님이 가신 뒤 남은 비구들이 무엇을 의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기술하고 있는 「대반열반경」 (D16) 또한 또 다른 불교식 거대담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4) 계 · 정 · 혜 –불교의 큰 틀

『디가 니까야』 는 불교의 큰 틀을 완성하고 있다. 이는 특히 『장부』 제1권의 핵심 주제이다. 『장부』 제1권의 「사문과경」 (D2)부터 「삼명경」(D13)까지를 통해서 부처님께서는 불교의 큰 틀을 계 ·정 ·혜 삼학으로 설정하고 계시는데, 이를 모두 23개의 상세한 정형구를 통해서 전개하고 계신다.(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해제를 참조할 것) 물론 『맛지마 니까야』 등의 다른 니까야에서도 부처님 가르침을 계 · 정 · 혜나 계 · 정 · 혜 · 해탈, 혹은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으로 분류하여 설하시기도 하지만, 『디가 니까야』 에서처럼 계와 정과 혜의 항목을 3계-4선-8통8)으로 상세하게, 그것도 비유와 함께 모두를 다 집대성해서 23가지로 망라해서 설하는 경은 없다.

이처럼 『디가 니까야』는 불교의 큰 틀을 완성해서 이것이야말로 사문이 따라야 하고 완성해야 할 출가자의 도닦음이요,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4선-8통이 진정한 사문됨의 결실이라고 천명하시기도 하고(D2), 이것을 바라문들의 삼명과 비교하시기도 하고(D3), 진정한 바라문이 갖추어야할 덕목으로 제시하시기도 하고(D4),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사의 완성이라고 설하시기도 하고(D5), 사문된 자가 고행을 넘어서서 모든 이론이나 억측이나 가설을 극복하고 실현해야 할 것이라고도 하신다. (D7, D8, D9)

 

그런데 여기서 고찰해 보고 넘어가야 할 것은 "4선-8통만이 부처님의 정설인가?"하는 점이다. 『장부』 제1권에서는 이렇게 4선-8통을 통한 깨달음의 완성을 불교의 큰 틀로 설하고 계시지만 다른 니까야에 포함된 경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음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중부』 등의 다른 니까야들에는 4선-3명으로 깨달음을 설하는 경들도 많고, 4선-6통으로 설하는 경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4선-4처-상수멸을 통한 깨달음도 적지 않게 나타나며, 특히 禪의 경지가 없이 오온이나 12처나 18계의 무상 · 고 · 무아의 통찰을 통한 염오-이욕-소멸-해탈을 설한 경들은 아주 많다.9) 그리고 연기의 통찰을 통한 해탈 · 열반을 설한경도 있다.

불교의 깨달음 혹은 해탈 · 열반은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나 사성제의 통찰이나 연기의 통찰이라는 통찰지(반야) 혹은 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禪은 사문이 누리는 중요한 결실이기는 하지만 해탈 · 열반 · 깨달음이 없는 禪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성된 경지라고는 할 수 없다.

이처럼 다른 니까야의 다른 경들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깨달음의 실현을 설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꼭 4선-8통을 해야 해탈 · 열반을 실현한다거나 깨달음을 완성한다고만 주장할 수는 없다. 단지 『장부』 제1권은 4선-8통의 체계로 이 문제를 정리하여 불교의 큰 틀을 완성하고 있을 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거듭 부연하거니와, 어떤 경우에도 사성제를 철견하고 번뇌를 완전히 끊는 누진(漏盡, 번뇌 다함)의 체험이 없이는 깨달음의 완성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4선-8통의 체계에서도 8통의 마지막인 누진통이 바로 깨달음을 뜻한다. 적어도 유신견, 계금취, 의심)으로 표현되는 세 가지 족쇄를 풀어버린 예류자 이상이 되어야만 최소한 깨달음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 아무리 4선과 4처의 선정체험을 깊이 해도 그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깨달음과는 관계없다.

물론 계율(건전한 삶)과 선정(삼매)이 없는 통찰지(반야)의 실현은 있을수 없다. 그래서 『디가 니까야』 는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계 ·정 ·혜 삼학으로, 그것도 3계-4선-8통의 큰 틀로 완성해 내고 있는 것이다.

 

(5) 신화적 기법의 채용

인도 혹은 인도 종교를 표현하는 말로 흔히들 만신전(萬神殿)이라는 말을 쓴다. 말 그대로 수만의 신들이 존재하는 종교 혹은 종교의 나라라는 표현이다. 베다 문헌에서부터 시작해서 『마하바라따』 와 『뿌라나』 문헌들을 거치면서 인도 신들의 수는 더욱더 많아지고 확장되어 가는데 후대 인도 신들은 모두 인도의 진리관과 세계관을 상징하는 브라흐마 ·위슈누 · 쉬와의 삼신(三神)으로 계통이 정리된다. 그리고 나머지 수많은 신들은(물론 부처님도 그들에게는 신이다) 모두 이 삼신의 화신들이나 수많은 아내들이나 장군들이나 장수들이나 마부들이나 하인들이나 하녀들 등등으로 받아들여져서 계급과 직책 등이 부여된다. 이렇게 신들도 삼신을 중심으로 카스트화가 되어버린다. 신들의 카스트화는 이미 『리그베다 본집』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제의서에서부터 베다에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카스트가 부여된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후대에 인도에 나타나는 모든 신들은 하다못해 조그마한 마을의 수문장격인 지방신에 이르기조차 모두 카스트화되어 삼신의 계열에 포함된다. 이것이인도의 제신(諸神)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다.

아무튼 신이 없는 인도, 신이 없는 인도 종교는 의미가 없어지고 또한 재미도 없어진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 기층 민중의 성향이 이러하기 때문에 인도에서 생긴 불교도 당연히 이러한 심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들의 심성을 어루만져주는 신화를 창조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디가 니까야』는 한층 종교화된 불교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도 기층민들의 이와 같은 성향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디가니까야』는 신화적 기법을 즐겨 쓰고 있다. 「대전기경」 (D14)을 통해서 부처님 혹은 깨달은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위빳시 부처님을 위시한 과거 여섯 부처님이 계셨고, 「전륜성왕 사자후경」 (D26)에서는 다시 멧떼야(미륵) 부처님이라는 미래의 부처님이 계실 것을 신화적인 기법으로 드러내신다. 이러한 말씀은 후대 대승불교에 큰 자극을 주어서 대승 전적에서는 여러 부처님의 존재를 설하고 있으며, 마침내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 중생즉불(衆生卽佛)의 사상으로까지 발전된다.

 

신들과 신화를 이야기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본서의 「대회경」 (D20)과 「아따나띠야 경」 (D32)이다. 이 두 경은 불자들을 악한 정령이나 힘으로부터 보호하는 보호주[護呪, paritta]로 설하신 경이다.10) 이러한 주문은 이미 인도 사회에는 아주 익숙한 종교 현상이었다. 『리그베다』 전체는 신들에게 헌공하는 주문을 모은 것이며, 특히 『아타르와베다』에는 상대를 해코지하고 파멸시키는 흑마술(黑魔術, black magic)에 관계된 주문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보호주는 이미 초기부터 불교에도 나타나는데 『숫따니빠따』 의 자애경과 길상경과 보경은 이러한 보호주로 설해진 것이라고 주석서들은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신비화한 종교적 성향이 자연스럽게 만뜨라의 암송을 중시하는 밀교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마하수닷사나 경」 (D17)과 「자나와사바 경」(D18)의 신화적인 서술을 통해서 불교 신도들에게 한층 종교화된 가르침으로 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특히 「마하고윈다 경」 (D19)에서는 고윈다라는 인도 끄리슈나 신의 이름을 통해서 부처님이 오랜 전생에 마하고윈다였을 때는 인류를 오직 범천에 태어나는 것으로 밖에 인도하지 못했지만 이제 금생에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셨기에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전적으로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D19. §61)고 선언하고 계신다. 이를 통해서 불교야말로 인도의 기층 종교 체계보다 완전히 업그레이드된 최고의 가치 체계요 최고의 신념 체계요 최고의 실천 체계임을 천명하셔서 불교의 위대성을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표현을 통해 완성하고 계신다.

『디가 니까야』의 적지 않은 경들이 이처럼 신화화되고 종교화된 가르침을 설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대할 필요는 없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마하고윈다 경」 (D19)은 팔정도로 회향하고 있으며, 우주의 기원을 설하시는 「세기경」 (D27)도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菩提分法, 37조도품]을 닦아서 "끄샤뜨리야도 … 바라문도 …와이샤도 … 수드라도 … 사문도 몸으로 단속을 하고 말로 단속을 하고 마음으로 단속을 하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을 닦아서 바로 지금여기에서 [오염원들을] 완전히 적멸하게 하여 열반을 얻는다."(D27 §30)고 결론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전륜성왕 사자후경」(D26)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燈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이[自歸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燈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歸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D26§27)는 자귀의 · 법귀의와 그 방법론으로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四念處]를 강조하시는 것으로 경을 시작하고 끝맺고 있다.

이처럼 신화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들에서 신화를 빼면 모두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팔정도와 37보리분법과 사념처 등이 골격으로 남게 되는 것이 신화적 표현을 사용하는 모든 경들의 한결같은 구조이다. 역자의 말에 의심이 드는 분들은 「마하수닷사나 경」 (D17)과 「자나와사바 경」 (D18)과 「마하고윈다 경」 (D19)에서 신화적인 표현을 모두 삭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를 시험 삼아 관찰해 보기를 권한다. 역자의 말이 전적으로 옳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도는 신비의 나라이고 신화로 가득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런 신비와 신화로 가득한 나라에서 생겨난 불교가 신화적 기법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뿐이다. 그리고 만일 불교가 끝까지 신화적 기법을 사용하기를 거부했더라면 아마 불교는 진작 인도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에 신화적인 표현이 많이 나타난다고 해서 의아해 하거나 거부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이러한 신화적인 구도를 통해서 부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파악 하려는 태도로 정독해야 할 것이다.

 

(6) 불교의 인도화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이다. 물론 그 깨달음은 언설을 넘어선 것이고, 역사(시간)를 넘어선 것이며, 문화를 넘어선 것이고, 지역을 넘어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도 언어와 역사와 문화와 지역이라는 기틀과 기반이 없이는 전개될 수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인도의 기존 사상과 수행과 종교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고 아울러 그것을 강하게 비판하게 되고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게 되었다. 이처럼 불교는 세존께서 해탈 · 열반을 성취하신 그 순간부터 이미 인도화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불교는 수동적으로 인도 문화 현상의 영향을 받는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도 문화에 개입하면서 인도의 기존 문화를 비판하고 그것을 합리적이고 공명정대하고 법다운 방향으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전개되었다. 우리는 『디가 니까야』를 통해서, 특히 『디가 니까야』의 『계온품』 과 『빠띠까 품』에 실린 경들을 통해서 불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인도의 문화 현상을 비판하면서 개입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인도에 대한 초기불교의 이러한 태도를 역자는 불교의 인도화라고 표현하고 있다.

먼저 계급주의와 바라문 제일주의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는데 「암밧타 경」 (D3)과 「소나단다 경」 (D4)과 「삼명경」 (D13)과 「세기경」(D27)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끄샤뜨리야, 바라문, 와이샤, 수드라의 네 집단과 사문의 집단은 모두 "중생들로부터 생겨났으며, 다른 것들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자들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다른 자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비법(非法)에 의해서가 아니다."(D27. §21)라고 강조하시는데, 이들은 결코 범천이나 어떤 다른 절대자나 다른 권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성계급이 뿌루샤라는 우주적 진인의 몸에서 생겨났다고 설하는 『리그베다』 의 「뿌루샤 숙따」 (RV.x.90)의 권위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특히인류 최초의 왕은 많은 사람들(mahājana)이 뽑았기(sammata) 때문에 마하삼마따(Mahāsammata) 왕이라 이름하였다고 소개하시면서 선거와 민주주의를 천명하신다.(D27. §20 참조)

그리고 바라문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삼베다(삼명)를 불교식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삼명을 제시하신다.(D3) 「꾸따단따 경」 (D5)에서는 동물 희생을 기본으로 하는 인도의 제사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이러한 동물을 죽이는 제사 대신에 깨달은 분이나 수행자 집단에 공양하고 오계를 지키는 등의 쉬우면서도 많은 공덕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형태의 제사를 제시하신다. 인도학자들은 불교가 이처럼 복잡하고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바라문교의 제사 대신에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며 팔정도를 실천하는 쉬운 수행법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삽시간에 인도 중원에 퍼질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행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인도 사문 집단을 향해서는 진정한 고행이 무엇인가를 천명하신다.(D8, D25)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부처님 가르침은 인도에 뿌리를 내리면서 인도화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위에서 설명한 보호주도 당연히 불교의 인도화에 넣어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앞에서 언급한 신화적 기법의 도입도 인도화라는 큰 틀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도야말로 신들의 나라요, 신화의 나라요, 신비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불교에 신화가 없었다면 이처럼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인도 땅에 불교가 그 뿌리를 내리기란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이다.

불교는 한편으로는 신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도의 기층민들에게는 이처럼 신화적인 기법을 많이 채용하면서 다가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라문 등의 지식인 집단이나 사문 등의 수행자 집단에게는 불교를 그들의 사상 체계나 수행 체계와 비교해서, 비판할 것은 강력히 비판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주면서 그들이 더 넓은 사상 체계와 수행 체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불교는 인도화하여 인도땅에 뿌리를 내리고 전개되어 왔다. 우리는 『디가 니까야』 를 통해서 불교가 어떻게 인도화되어 왔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부처님께서 무아를 극력 천명하신 것도 이러한 바라문 중심의 인도 기층 사상이 자아(아뜨만)에 함몰되어 그와 하나 되고 그것의 위대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만 나아가게 되면서 그러한 합일[梵我一如]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고 최고의 경지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바라문들을 중심에 둔 당시 인도의 사상계나 종교계가 자아와 하나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설하지 않았다면 부처님께서는 분명 다른 술어를 사용해서 연기의 이치를 설명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이러한 사실은 왜 부처님께서 인도에 태어나셔서 깨달음을 성취하셨는가하는 것에 대한 대답도 된다. 당시 인도 사상과 종교와 수행 체계는 자아와의 합일이라는 나름대로 아주 정교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존의 사상과 수행 체계를 완전히 섭렵했기 때문에 고따마 싯닷타는 자아와의 합일이라는 미세하고 세련된 경지(sukuma-sacca-saññā, D9)를 척파하고 무아와 연기의 도리를 철견하여 이를 사성제와 팔정도의 체계로 살려내어 명실상부한 인류 최고의 가치 체계로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불교는 인도 사회에 대한 비판과 훈습이라는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뿌리내리고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디가 니까야』 를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7) 진정한 도(道)의 천명

『디가 니까야』가 아무리 신화적인 기법을 도입하여 한층 종교화된 모습으로 세인들에게 다가가고, 인도의 기존 수행자들과 지식인들과 정치인들과 재력가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인도화된 모습을 진하게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이나 직계제자들이 이러한 여러 방법을 채택해서 드러내고 보여주고 천명하고자 하신 것은 진정한 도, 진정한 출가의 길,진정한 청정범행, 진정한 해탈, 진정한 대자유, 진정한 깨달음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없었다면 세존의 깨달음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므로 불교는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고 존재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 세존께서는 진정한 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이 하나를 위해서 앞의 여섯 가지 방법을 동원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불교는 세상에 존재할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인도에서 8세기 이후에 쇠퇴일로를 걸은 불교가 12세기 쯤에는 완전히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가장 큰 이유도 이런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후대로 올수록 인도불교는 베단따 학파, 냐야 학파, 요가 학파, 딴뜨라 체계 등과 너무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초기경들에서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인류 만대를 위한 메시지를 거의 잊어가게 되고, 한편으로는 흡인력이 강한 인도 토착 종교나 토착사상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러면 『디가 니까야』 를 통해서 부처님께서 천명하신 진정한 도는 무엇일까?

먼저 신화적인 기법이 강하게 배어있는 「마하고윈다 경」 (D19)이 이것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이 경에서 세존께서는 빤짜시카 간답바가 들려준 마하고윈다의 일대기를 다 들으신 뒤에 그때의 마하고윈다 바라문이 바로 지금의 세존이라고 하시면서 그때의 "나의 그런 청정범행은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했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했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범천의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라고 회고하신다.(§61)

그리고 다시 말씀하신다.

"그러나 지금 나의 이러한 청정범행은 전적으로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바로 이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그것은 곧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니라."(Ibid)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마하고윈다(고윈다는 힌두교에서 위슈누의 8번째 화신으로 여기는 끄리슈나의 이름이다)로 상징되는 기존의 인도 사상과 수행체계는 범천에 태어나는 것만을 가르치지만, 세존이 천명하시는 팔정도는 염오, 이욕, 소멸, 고요, 지혜, 깨달음,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천명하신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시 제1권의 「범망경」 (D1)이다. 「범망경」 은 62가지 견해를 과거에 관한 것과 미래에 관한 것으로 대별해서 상세하게 설명하신 뒤 견해란 아무리 다양해도 경험된 것(vidita, 느껴진것)일 뿐이고, 그 경험된 것(느껴진 것)은 여섯 감각장소-여섯 감각접촉에서 기인한 것이며, 그래서 다시 느낌-갈애-취착-존재(업지음)-생-노사우비고뇌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고 8지 연기를 말씀하신 뒤, 이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철견하는 것이 바로 모든 견해의 그물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진정한 해탈의 길이다.

 

그리고 제1권의 「사문과경」 (D2)부터 「삼명경」 (D13)까지는 23가지로 정리된 계 · 정 · 혜 삼학의 실천을 진정한 도닦음으로 설하고 계신다. 제2권의 「대전기경」 (D14)과 「대인연경」 (D15)에서는 10지 연기와 9지 연기의 순관과 역관, 그리고 오취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함으로 해서 인도인들이 아등바등 거머쥐고 있는 자아라는 실체론을 척파하는 길을 제시하신다.

그리고 「대반열반경」 (D16)에 의하면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는 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시다.(§6.7) 주석서에서는 이 말씀을 "마음챙김의 현전(sati-avippavāsa)을 통해서 해야 할 바를 모두(sabbakiccāni) 성취하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반열반하시는 침상에 누우셔서 45년 동안 주셨던 교계(敎誡, ovāda) 모두를 불방일(不放逸, appamāda)이라는 단어에 담아서 주셨다."(DA.ii.593)라고 풀이 하고 있다. 한편 복주서에서는 "그런데 이것은 뜻으로는 지혜를 수반한(ñāṇūpasañhitā) 마음챙김이다. 여기서 마음챙김의 작용은 굉장한 것(sātisaya)이기 때문에 마음챙김의 현전이라고 설명하였다. 전체 부처님의 말씀을 다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불방일(appamada)이라는 단어에 담아서 주셨다."(DAT.ii.239)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도 보듯이 불방일과 동의어인 마음챙김(sati)의 현전이야말로 부처님 45년 설법을 마무리하는 굉장한(sātisaya) 가르침이라고 복주서와 주석서는 강조하고 있다.(D16. §6.7의 주해에서 인용)

그리고 「전륜성왕 사자후경」(D26)에서는 경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燈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이[自歸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燈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歸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고 그 방법으로 몸 · 느낌 · 마음 · 법의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四念處]를 설하신다. 이처럼 『디가 니까야』에서 마음챙기는 공부는 계속 강조되고 있는데, 사실 마음챙김(sati)은 인도의 기존 수행체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불교 특유의 수행체계이다.(여기에 대해서는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서문을 참조할 것)

그리고 「세기경」 (D27)과 「확신경」 (D28)과 「정신경」 (D29)에서는 불교의 실천도로서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菩提分法, 助道品]이 제시되고 있다.

이처럼 『장부』 전체에서 계 · 정 · 혜 삼학과 팔정도와 37보리분법과 사념처, 그리고 연기(緣起)의 통찰이 설해지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바른 마음챙김[正念]의 천명이 부처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도, 진정한 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4념처를 그 내용으로 하는 바른 마음챙김은 여러 경에서 자귀의 · 법귀의 실천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고행을 통한 금욕과 삼매 수행을 통한 신통을 구족하려는 사문의 길과, 제사와 베다 공부와 삼매 체험을 통해서 범천에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바라문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팔정도로 대표되는 도닦음을 통해서 완성되는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성자의 경지를 드러내신다. 그래서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의 해탈[慧解脫]을 완성한 아라한을 정점으로 하는 이러한 성자는 태생이나 계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성[戒]과 깊고 평화롭고 고결한 인품[定]과 투철한 통찰지[慧]에 의해서 실현된다고 『디가 니까야』는 여러 경들을 통해서 천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디가니까야』가 제시하는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6. 번역에 임하는 몇 가지 태도

 

(1) 주석서를 중시하였다

경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고 더군다나 소설도 수필도 아니다.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해탈 · 열반을 실현하는 체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정전(正典)이다. 경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언어학적 소양만으로는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 경은 부처님의 직계제자들로부터 비롯된 경의 안목을 빌지 않고서는 결코 심도 깊게 이해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부처님 말씀을 이해해야 할 것인가? 경에 나타나는 특정한 술어와 특정한 구문과 특정한 배경과 특정한 문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고민한 것이 바로 주석서 문헌(Aṭṭhakathā)이다. 그러므로 주석서는 삼장(Tipiṭaka)에 대한 가장 오래된 권위이다. 혹자는 주석서를 단순히 붓다고사라는 주석가의 견해 정도로 치부하려 한다. 그러나 『청정도론』 서문에서 정리하였듯이 주석서는 결코 붓다고사 스님의 개인 작품이 아니다. 붓다고사 스님은 각 주석서의 서시와 후기 등에서 이러한 사실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붓다고사 스님 이전에 이미 싱할리로 전승되어오던 마하앗타까타(대주석서)라는 방대한 문헌이 있었고,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마하앗타까타는 이미 아소까 대왕 때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로 불교를 전파하기 이전의 인도 스님들의 일화 등을 아주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붓다고사 스님이 각 주석서의 후기에서 거듭 밝히듯이 주석서는 부처님 직계제자들로부터 비롯한 부처님 말씀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해서 스리랑카의 대사(大寺, Mahāvihāra)가 정통적 견해로 인정한 상좌부 교단의 공식적인 견해이다. 그러므로 경을 번역하면서 이러한 주석서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번역가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한 문법적 지식이나 서구 언어학자들이 판단한 불교술어에 대한 이해만을 가지고 경을 옮기려 드는 것이야말로 번역가의 치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역자는 경의 원문을 옮기면서 원문만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애매한 부 분은 가급적이면 많이 주석서를 주해에서 인용하고 있다. 독자들이 부 처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2) 정형구의 주해와 찾아보기

경은 문자로 전승된 것이 아니다. 경은 일차합송 때부터 합송(合誦, saṅgīti, 함께 노래함)으로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가르침은 전부 정 형화 되어서 니까야들 전반에서 꼭 같은 형태로 전승되어 온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노래 가사에 후렴구를 반복해서 넣어서 그 노래가 전하 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나 감정을 듣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호소하 는 방법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가르침은 거의 대부분 정형구로 나타난다. 이것이 빠알리 삼장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므로 이 정형구 안에 나타나는 술어와 내용에는 부처님 가르침의 골수가 들어 있다.

『디가 니까야』 에도 수많은 정형구가 같은 경 안에서도 반복해서 나 타나고 다른 경들에서도 거듭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앞 경에서 나타났던 정형구가 다음 경에서 또 나타날 때 그 정형구에 포함된 중요 술어들에 같은 주해를 다음 경에서 또 달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정 형구 안에 나타나는 술어들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앞의 경을 읽지 않 고 뒤에 나타나는 특정한 경만을 선택하여 읽는 사람은 그 정형구의 중 요 술어에 대한 주해가 없는 번역을 읽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경의 이해 가 어렵게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서 제3권 말미에 수록하고 있는 찾아 보기에서는 역자가 주해를 한 술어들에 대한 색인을 중점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특정한 경만을 읽는 분들은 이 찾아보기를 통해서 특정 술어에 대한 주해가 나타나는 곳을 찾아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3) 『청정도론』 과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중시하였다

이미 『청정도론』 해제에서 밝혔듯이 『청정도론』은 그 성격상 4부 니까야 전체에 대한 주석서이다.(본서 제3권 부록 『장부 주석서』 서문 §3 참조) 그러므로 4부 니까야 전체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술어와 개념은 거의 대부분 『청정도론』 에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요한 술어들은 『청정도론』에서 설명되었기 때문에 각 니까야의 주석서에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청정도론』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였다."라고 적고 넘어가버린다. 그런 만큼 『청정도론』 없는 주석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청정도론』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초기경의 체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청정도론』은 다시 『아비담맛 상가하』 (『아비담마 길 라잡이』)가 없이는 그 핵심이 되는 술어와 가르침을 파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먼저 『아비담마 길라잡이』 를 상 • 하로 출간하였고 이를 토대로 『청정도론』을 세 권으로 출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자도 본서를 번역 출간하면서 『청정도론』 과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토대로 하였으며 주해에서 『청정도론』 과 『아비담마 길 라잡이』 의 해당 부분을 지적하여 참고하도록 하였다. 물론 아주 중요하 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본서의 주해에서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러므로 본서를 읽는 분들은 항상 옆에 『청정도론』과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두고 참조하실 것을 권한다. 그렇게 하면 부처님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4) 술어를 한글화하려 하였다

이미 『청정도론』 해제와 『아비담마 길라잡이』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모든 술어들을 가급적이면 한글로 풀어 적는다 는 원칙을 세웠다. 그 원칙은 『디가 니까야』 의 번역에서도 철저하게 유 지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짝쿠냐니(calkhu- vinitana, 眼識)는 '눈의 알음알이' 등으로 옮겼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기본 법수가 되는 칸다(khandha, 蘊)는 '무더 기록, 다뚜(that, 界)는 '요소'로, 인드리야(indriya, 根)는 '기능' 혹은 '감 각기능'으로, 아야따나(ayatana, 處)는 '장소' 혹은 감각장소'로 옮겼다.

물론 이렇게 하다보면 한문 용어에 익숙한 분들은 당황스럽고 짜증나 기 마련일 것이다. 그래서 한문 불교 용어에 익숙한 분들을 위해서 많은 곳에서 눈의 알음알이[眼識], 무더기[蘊], 기능[根] 등으로 한문을 병기했 다. 그리고 무리하게 한글식 표기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 절집에서 통용되는 한자말들은 그대로 사용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국집(局執), 철견(徹見), 실참실수(實參實修), 배대(配對), 반연(攀緣) 등이다.

 

(5) 존칭 문제

본서 제3권에 부록으로 번역하여 수록한 『장부 주석서』 서문에서 밝 히고 있듯이(568) 초기경에서 정리된 8만 4천의 가르침 가운데 8만 2천 은 부처님으로부터 전승된 것이고 2천은 비구들이 설한 것이다. 이처럼 삼장은 거의 대부분 부처님의 말씀을 합송한 것이다. 부처님이 대화를 나눈 상대는 비구를 비롯한 부처님 제자들, 유행승과 나체수행자를 비 롯한 외도 수행자들, 범천과 인드라와 같은 신들, 120살이 된 연로한 바 라문, 20살이 안된 바라문 학도, 연로하거나 젊은 왕, 여러 상인들, 평민 들 등 아주 다양하였다. 인도어는 일차적으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존칭법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영어로 옮기는 데는 존칭 표기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한글로 옮길 때 이들에 대한 존 칭을 어떻게 사용하여 옮길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사안이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삼계의 도사요 사생의 자부이시기 때문에 모두 평어체 로 옮겨야 한다고도 주장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하여 부처님께서 연로 한 사람들에게나 왕들에게 평어체로 말씀하신 것으로 옮기면 이것이 오 히려 부처님을 무례한 분으로 비치게 하지는 않을까 역자는 많이 고심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하였다.

① 모든 사람들(신들 포함)이 부처님께 말씀을 드릴 때는 모두 경어체 로 표기한다.

② 부처님이 아주 연장자임이 분명한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는 존칭어 로 옮긴다.

③ 그 외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평어체로 옮긴다.

④ 그 외 비구가 비구들에게, 비구가 재가자들에게, 재가자가 재가자 들에게 등의 경우에는 상호 존칭어로 옮긴다.

⑤ 부처님과 신들이나 왕들과의 대화는 상호 경어체로 하였다.

 

(6) 전체 해제 대신에 『디가 니까야 주석서』 서문을 실었다

역자는 본서에서 『디가 니까야』 전체를 아우르는 해제는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에 각 품별로 해제를 준비하여 각권의 서두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전체 해제는 상좌부의 정통 견해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여 『디가 니까야 주석서』 서문(nidānakathā)을 본서 제3권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었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 서문은 부처님 입멸 후에 진행된 일차대합송이 있기까지의 일화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고 특히 일차대합송에서 확정된 율장, 경장, 논장의 내용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을 ① 맛으로는 한 가지 ② 법과 율에 의해서는 두 가지 ③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의해서는 세 가지 ④ 삐따까(藏)에 의해서도 세 가지 ⑤ 니까야에 의해서는 다섯 가지 ⑥ 구성요소에 의해서는 아홉 가지 ⑦ 법의 무더기[法蘊]에 의해서는 8만 4천 가지라는 일 곱 가지 방법으로 심도깊이 살펴보고 있다.

그러므로 빠알리 삼장과 『디가 니까야』 에 대한 역자의 개인적인 이해보다는 빠알리 삼장의 결집 과정과 삼장의 전체 구성에 대한 상좌부의 정통 견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전체 해제 대신에 『디가 니까야 주석서』 서문을 번역하였다.

 

(7) 각 경들에 대한 해제는 싣지 않았다

역자는 『디가 니까야」를 옮기면서 독자들이 본서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최대의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디가 니까야』 34개의 경들 각각에 대한 해제를 모두 만들었다. 이것을 모두 합하면 원고지 900매가 넘는 많은 분량이었고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책을 출판하면서 다시 한 번 고심하였다. 아무래도 역자가 이해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각 경의 해제를 각 경의 앞에 달아야하는가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뒤 대림 스님과 상의하여, 결국은 각 경의 개별적인 해제 는 출간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역자의 견해가 담긴 해제가 독자들의 경전 이해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두려워서이다. 그리고 2 천 개가 넘는 각 경의 주해에서 이미 경들에 대한 역자의 견해를 충분히 밝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100여 년 전(1900년)에 『디가 니까야』 를 처음으로 영어로 옮긴 리즈 데이빗(T. W. Rhys Davids) 교수님은 각 경의 앞에 멋진 해제를 달았다. 그러나 1987년에 새로운 번역을 한 월슈(M. Walshe) 거사님은 각 경의 개별적인 해제는 붙이지 않았다. 월슈는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이미 서양에서도 나름대로 깊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각 경에 대한 자신의 해제를 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을 참고 하여 역자도 해제를 싣지 않고 출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역자가 준비한 각 경의 해제는 추후에 초기불전연구원 홈페이지에 모두 올려서 공개할 예정임을 밝힌다. 각 경에 대한 역자의 해제를 기대했던 독자제 위의 양해를 구한다.

 

7. 맺는 말

역자는 『청정도론』 발간사에서 빠알리 삼장을 제대로 역출해내기 위해서는 언어학적 소양, 경에 대한 안목, 수행의 뒷받침이라는 세 가지 기본 장비들이 있어야 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경전 번역을 계속하면서 '나에게는 과연 이러한 기본 장비들이 충실히 갖추어져 있는가?'를 줄곧 되물어보았다. 그럴 때마다 두려움은 더 커져갔다. 작년 말이나 올해 초 에 출간되었어야 할 본서를 이제야 출간하는 데는 이러한 두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 『디가 니까야』 한글번역을 세상에 내어 놓게 되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역자가 오역을 하고 탈역을 한 부분과 오자와 탈자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교정의 최종 점검을 해주신 대림 스님과 2차 교정과 3차 교정을 해주신 김성경 거사님, 정양숙 불자님, 박정선(법명) 불자님과 그리고 1차 교정에 자원봉사를 해주신 28분의 스님들과 불자님들이 정성을 다해서 교정을 해주셨다. 그래도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역자가 우치한 이유 때문이다. 읽는 도중 잘못된 부분을 발견한 독자제위께서는 반드시 이것을 지적해주시어 다른 니까야의 출간에는 모두 반영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제1권 계온품 해제(解題)>


1. 계의 무더기[戒蘊]를 중심에 둔 품

『디가 니까야』는 모두 34개의 경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다시『계온품』과『대품』과『빠띠까 품』의 세 품으로 나누어지며 이들은 각각 13개, 10개, 11개의 경들을 포함하고 있다.『디가 니까야』제1권은『계온품』(戒蘊品)이라 한다. 이는 빠알리어 실라칸다왁가(Sīlakhandha- vagga)를 sīla(계)-khandha(온)-vagga(품)로 이해해서 직역한 말인데 ‘계의 무더기를 [중심에 둔] 품’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왜 계의 무더기를 ‘중심에 둔’ 품이라고 풀이했는가 하면,『디가 니까야』의 세 품 가운데 첫째 품을 구성하고 있는 13개의 경은 공통적으로 계의 무더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본 품의 이름을『계온품』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의 무더기[戒蘊]란 본 품의 첫 번째 경인「범망경」에 정형화되어 나타나는 ‘짧은 길이의 계’(§§1.8~1.10, 모두 26가지)와 ‘중간 길이의 계’(§§1.11~1.20, 모두 10가지)와 ‘긴 길이의 계’(§§1.21~1.27, 모두 7가지)를 말한다.『디가 니까야』의 제1품에 속하는 13개의 경들은 모두 예외 없이 계의 무더기로 불리는 이 정형구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특별히 이 품을『계온품』이라 이름한 것이다.


2. 계․정․혜 삼학(三學)의 공유

그러면 제1품의 13개 경은『계온품』을 공유한다는 특징 외에 다른 사항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제1품 가운데「범망경」(D1)을 제외한 나머지 12개의 경은 모두 더 중요한 특징을 서로 공유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계․정․혜 삼학(三學)이다. 

『디가 니까야』제1권의「사문과경」(D2)은 출가자가 닦아야 할 것으로 3가지 계의 무더기와 감각대문의 단속 등의 공부지음을 들고, 이것을 통해서 4가지 禪과 8가지 지혜를 실현하는 것을 사문됨의 결실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모두 23가지가 되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다 … 그는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

②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는다 …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한다.

③ 이와 같이 출가하여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면서 머문다 …

④ <짧은 길이의 계 - 모두 26가지로 계를 지님> 

⑤ <중간 길이의 계 - 모두 10가지로 잘못된 행위를 멀리함>

⑥ <긴 길이의 계 - 모두 7가지로 삿된 생계를 멀리함>

⑦ 이와 같이 계를 구족한 비구는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 … 


⑧ 비구는 감각의 대문을 잘 지킨다 …

⑨ 비구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잘 갖춘다 …

⑩ 비구는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한다 …

⑪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 해태와 혼침을 버려 …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 의심을 건너서 머문다.(다섯 가지 장애의 극복)


⑫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⑬ 제2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⑭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⑮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⑯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⑰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⑱ 신통변화[神足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⑲ 신성한 귀의 요소[天耳界, 天耳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⑳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이렇게 모두 2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본서「수바 경」(D10)에서 아난다 존자는 이 가운데 ①부터 ⑦까지를 계의 무더기[戒蘊, sīlakkhandha]라고 정리하고 있고, ⑧부터 ⑮까지를 삼매의 무더기[定蘊, samādhi- khandha]라고 정리하고 있으며, ⑯부터  까지를 통찰지의 무더기[慧蘊, paññā-khandha]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렇게 계온과 정온과 혜온은「사문과경」(D2)에서 모두 23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난다. 물론 보는 입장에 따라서 예를 들면 오개(五蓋)의 극복에 대한 정형구를 초선에 포함시킨다든지 하여 23가지보다 더 적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자는 이렇게 23가지로 파악하는 것이『디가 니까야』의 다른 경들이나 다른 니까야의 경들에 나타나는 정형구들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적절한 분류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정리된 23가지 계․정․혜의 정형구들은 세 번째인「암밧타 경」(D3)부터 본 품의 마지막인「삼명경」(D13)까지 모두 적용되고 있다. 물론 적용하는 데는 각 경의 주안점에 따라서 조금씩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전체 골격은 모두 이 23가지 계․정․혜의 정형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암밧타 경」(D3)에서는 영지와 실천 즉 명(明, vijjā)과 행(行, caraṇa)에 각각 8통과 4선이 배대(配對)되어 설명된다. 물론 이러한 명과 행을 갖추기 위해서 기본으로 닦아야 하는 계의 무더기의 정형구(①부터 ⑦까지)와 나머지 공부지음의 정형구(⑧부터 ⑪까지)도 당연히 설해지고 있다.

「소나단다 경」(D4)에서는 참된 바라문이 갖추어야 할 요소로 계행이 청정함과 지혜로움의 두 가지로 결론을 짓고 이 둘을 각각「사문과경」(D2)의 계의 무더기와 8가지 통찰지의 무더기로 배대해서 설명한다. 물론 여기서도 삼매의 무더기는 언급이 되고 있는데 이는 8가지 통찰지를 실현하기 위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꾸따단따 경」(D5)에서는 전통적인 제사보다 더 수승한 제사로 다섯 가지를 언급하는데 그 가운데 제일 마지막으로 계․정․혜 삼학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는 4선과 8통이 전통적인 제사보다 덜 번거롭고 덜 어려우면서도 더 많은 과보와 더 많은 이익을 주는 제사로 언급이 되며 23가지 정형구 가운데 ①부터 ⑪까지는 이러한 삼매와 통찰지를 얻는 토대로서 언급이 되고 있다.

「마할리 경」(D6)에서 부처님께서는 신통보다 더 높고 더 수승한 법들로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을 언급하시고 이러한 성자의 경지를 체득하는 도닦음으로 8정도를 천명하신다. 그런 뒤에 이 팔정도를 다시 본 품의 기본 주제인 계․정․혜 삼학의 23가지 정형구로 설명하신다.

「잘리야 경」(D7)은「마할리 경」의 후반부와 같은 내용이므로 언급을 생략한다.

「깟사빠 사자후경」(D8)은 “참으로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초월지에 의해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무는 것”을 참된 사문이요 참된 비구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계․정․혜 삼학의 23가지 정형구를 천명하신다.

「뽓타빠다 경」(D9)은 인식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공부지음을 설명하면서 먼저 4선-3처의 특별한 인식을 일어나게 하는 과정으로 ①부터 ⑪까지를 든 뒤에 ⑫부터 ⑮까지의 4선의 정형구를 들고 다시「사문과경」(D2)에는 나타나지 않는 3처의 정형구를 들고 있다. 본경은 그 주제가 인식의 일어남과 소멸이기 때문에 8통이라는 통찰지의 구족 대신에 이처럼 4선과 3처로 설명하고 있으며, 인식이 완전히 소멸된 경지로 상수멸(想受滅)을 언급하고 있다.

「수바 경」(D10)은 아난다 존자가 23가지 정형구 가운데 ①부터 ⑦까지를 계의 무더기로, ⑧부터 ⑮까지를 삼매의 무더기로, ⑯부터 까지를 통찰지의 무더기로 정리하고 있는 중요한 경이다.

「께왓다 경」(D11)은 본 품에서 정리하고 있는 계․정․혜 23가지 정형구야말로 진정한 신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로힛짜 경」(D12)은 본 품에서 정리하고 있는 계․정․혜 23가지 정형구를 가르치는 스승은 세상에서 질책받지 않아야 할 스승이라고 천명한다.

「삼명경」(D13)은 범천에 태어나는 길로 본 품에서 정리하고 있는 23가지 정형구 가운데 ①부터 ⑪까지 즉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함까지를 언급한 뒤에 자애, 연민, 같이 기뻐함, 평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四無量]을 비유와 함께 설하고 있다. 자애, 연민, 같이 기뻐함, 평온의 네 가지야말로 범천에 태어나는 길이라는 말씀이시다. 이처럼「삼명경」은 삼매[定]와 통찰지[慧]에 해당하는 정형구를 언급하지 않는데 본경의 주제가 해탈․열반의 실현이 아니라 범천에 이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의 특성상「뽓타빠다 경」(D9)과「삼명경」(D13)에서만 23가지 정형구가 모두 언급되지 않을 뿐이지, 이 둘과「범망경」(D1)을 제외한『계온품』의 나머지 10개의 경들은 모두 23가지 정형구를 각 경의 특성에 맞게 모두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범망경」과「뽓타빠다 경」과「삼명경」을 제외한 나머지 10개의 경들은 계․정․혜 삼학을 23가지로 정리한 정형구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체계로『계온품』은 구성되어 있다.


3. 인도와의 대화

『계온품』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을 들라면 ‘인도와의 대화’ 혹은 ‘불교의 인도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계온품』에 포함되어 있는 경들을 청법자(聽法者)의 측면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계온품』의 13개 경을 청법자의 측면에서 분류해 보면, 바라문이 6군데, 외도 수행자가 3군데, 왕이 2군데, 비구 대중이 한 군데, 장자가 한 군데이다. 이처럼 본 품은 거의 전부가 당대의 지식인(바라문), 수행자(나체 수행자, 유행승), 정치인(왕, 태수), 재력가(장자)에게 설하신 경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구들에게 설하신 경은 오직 한 군데뿐이다. 이것은『디가 니까야』제2품인『대품』에서는 7개의 경이, 제3품인『빠띠까 품』에서는 6개의 경이 비구들에게 설해진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볼 때 본 품은 비구들을 대상으로 하여 부처님의 기본 사상과 도닦음을 가르치려는 측면을 드러낸다고 하기 보다는, 인도의 기층 지식인과 수행자와 정치인과 재력가들을 상대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 즉 인도화 되어가는 과정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자는  ‘인도와의 대화’니 ‘불교의 인도화’니 하는 표현을 해본 것이다.


본 품에 실려 있는 경들을 대화를 나눈 대상에 따라서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식인(바라문)이다. 세존께서는 본 품에서 바라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불교야말로 진정한 삼명(三明, 삼베다)을 실현하는 가르침이요(D3), 불교야말로 바라문이 갖추어야 할 진정한 덕목을 갖추는 길이요(D4), 불교야말로 참다운 제사를 올리는 길이요(D5), 불교는 계․정․혜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요(D10, 아난다 존자의 설명임), 불교야말로 진정으로 이웃에게 이익을 나누는 길이요(D12), 불교야말로 진정으로 범천에 태어나는 길임을 역설하신다.(D13) 그리고 당대의 수행자들에게는 불교야말로 진정한 고행과 금욕의 길이요(D8), 불교야말로 육체와 영혼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희론을 넘어서서 진정한 대자유인, 진정한 대장부가 되는 길이며(D7), 불교야말로 자아라는 존재론적 가설을 척파하고 지금여기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역설하신다.(D9) 정치인들(왕)에게는 불교의 진면목을 계․정․혜의 삼학과(D2) 팔정도로 설명해 주신다.(D6) 

이처럼 인도의 지식인, 수행자, 정치인, 재력가들에게 불교의 근본을 천명하면서 불교는 인도에 자신의 의미 있는 고유 영역을 굳히면서 토착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아쇼까 대왕 때는 인도 주위 열 곳으로 전파가 되었고, 다시 히말라야를 넘어 중앙아시아로, 다시 중국으로,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등지로 퍼져나갔고, 요즘은 유럽과 미주 대륙에 이르기까지 전파가 되어서 인류를 계․정․혜의 삼학과 팔정도의 길로 인도하고 있으며, 인류에게 참다운 행복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런 불법(佛法)의 전파에는 인도 토착민들과의 대화를 통한 불교의 인도화가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본 품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가 인도화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 있게 살펴볼 수 있다.


4. 견해의 그물을 뚫기

물론「범망경」(D1)은 계의 무더기(계온)를 다른 경들과 함께 공유하면서도, 인류가 가질 수 있는 견해를 과거에 대한 것 18가지와 미래에 대한 것 44가지로 나누어 모두 62가지 견해로 정리한 뒤, 감각장소-감각접촉-느낌-갈애-취착-존재-생-노사의 8지 연기로 62견이 일어나는 구조를 밝히고 있으며, 이렇게 견해는 조건 발생이기 때문에 견해의 그물을 뚫고 나오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연기의 발생 구조와 소멸 구조의 이해를 통한 견해의 극복을 천명하는 너무도 중요한 경이다. 그래서「범망경」이야말로 다양한 견해를 표출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견해의 노예로 전락해가는 인류에게 던지시는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본경을『장부』를 대표하는 경으로 간주하여 첫 번째 경으로 결집하였을 것이다. 


아무튼『장부』의 제1권『계온품』(실라칸다왁가)은「범망경」(D1)을 제외하고는 모두「사문과경」(D2)에서 정리한 계․정․혜를 여러 문맥에 적용시키면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세상에 천명하고 있다. 참으로 계․정․혜라는 법의 바퀴가 인도라는 땅을 만나서 인도의 수행자들(나체 수행자, 유행승 등), 지식인들(바라문), 정치인들(왕과 대신들), 재력가들(장자)과의 대화를 통해서 굴러가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이렇게 해서 법의 바퀴[法輪]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사바세계에서 굴러가고 있다. 그래서 법륜은 전륜성왕의 윤보(輪寶, 바퀴 보배)에 비유되는 것이다.


5.『계온품』 각 경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⑴「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 Sutta, D1)

인간은 견해의 동물이다. 인간은 매순간 대상과 조우하면서 수많은 인식을 하게 되고 그런 인식은 항상 견해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가지는 견해는 너무도 다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견해는 항상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라는 질문을 수반한다. 견해란 무엇인가? 아니 바른 견해란 도대체 무엇인가? 바른 견해란 도대체 가능한 것일까? 인간은 견해 없이 살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실까? 

견해의 문제에 대한 고뇌를 누구보다 많이 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디가 니까야』의 첫 번째가 되는「범망경」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견해를 과거에 관한 것 18가지와 미래에 관한 것 44가지로 나누어서 모두 62가지로 분류해서 심도 있게 설명하고 계신다. 이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8가지 과거를 모색하는 자들

    I-1. 영속론자들 - 4가지

    I-2. 일부영속 일부비영속론자들 - 4가지

    I-3. 유한함과 무한함을 설하는 자들 - 4가지

    I-4. 애매모호한 자들 - 4가지

    I-5. 우연발생론자들 - 2가지

㈏ 44가지 미래를 모색하는 자들

    II-1. 사후에 자아가 인식과 함께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16가지

    II-2. 사후에 자아가 인식 없이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8가지 

    II-3. 사후에 자아가 인식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8가지 

    II-4. 단멸론자들 - 7가지 

    II-5.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 5가지


그러나「범망경」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견해를 모두 62가지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범망경」은 오히려 왜 이렇게 다양한 견해가 생길 수밖에 없느냐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명쾌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견해란 조건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본경에서 견해는 ‘느껴진 것(vedayita)’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복주서는 “체험되고(anubhūta) 경험된 것(anu- bhavana)”으로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이 경험된 것은 대상과 감각기능과 알음알이의 세 가지가 서로 조우할 때 일어나는 감각접촉[觸, phassa]에 조건 지워진 조건발생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 발생을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말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견해를 감각기능․감각대상․알음알이[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에서 기인한 감각접촉의 산물이라고 불교의 연기 구조로 명쾌하게 정의하신다. 이렇게 하여 견해의 문제는 마침내 괴로움의 발생 구조[流轉門]와 소멸 구조[還滅門]를 적나라하게 밝힌 연기의 가르침으로 회통이 되고, 이것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로 정리된 불교 만대의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으로 귀결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이런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무아의 가르침이요 무아의 가르침은 바로 존재론적인 실체인 자아를 해체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연기-무아로 존재론적인 실체인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떨쳐버릴 때 그것이 바로 견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러므로 62견은 연기-무아를 철견할 때 극복된다는 것이 본경의 결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본경은 팔정도의 첫 번째인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견해의 내용인 연기의 가르침을 천명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4부 니까야의 첫 번째인『디가 니까야』를 대표하는 첫 번째 경으로 결집이 되었을 것이다.


⑵「사문과경」(沙門果經, Sāmaññaphala Sutta, D2)

출가란 말 그대로 집을 떠나는 행위이다. 집을 떠난다 함은 단순히 물질적인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모든 의무나 권리나 욕망이나 희망을 모두 접는다는 뜻이기도 하다.「사문과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경의 제목처럼 이러한 출가 즉 사문됨(출가생활)의 결실이다. 본경에서 출가생활의 결실을 세존께 질문하는 사람은 아자따삿뚜라는 당대에 제일 막강했던 마가다를 통치하는 왕이다. 그는 그 시대를 풍미하던 여섯 종교 지도자들의 사상과 비교하면서 불교 수행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실현하게 되는 결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는 세존께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술 분야들이 있습니다 … 그런 기술의 결실은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으며 그들은 그런 결실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부모를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처자식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친구와 동료를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사문․바라문들에게 많은 보시를 합니다. 그러한 보시는 고귀한 결말을 가져다주고 신성한 결말을 가져다주며 행복을 익게 하고 천상에 태어나게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도 이와 같이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을 천명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 드린다.

이러한 왕의 질문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23가지로 정리된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로 대답하시는 것이 본경의 전체 구조이다. 이 정형구는 이미 앞에서 요약해서 정리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리고 본경은 우리에게 육사외도(六師外道)로 알려진 부처님 시대의 여섯 명의 종교 지도자의 사상을 서로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경이다. 육사외도 가운데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알려진 산자야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은 적취설(積聚說)로 대표되는 인도 사문 전통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⑶「암밧타 경」(Ambaṭṭha Sutta, D3)

인도 최고(最古)요 최고(最高)의 권위인『리그베다』의「뿌루샤 숙따」(Pruṣa Sūkta, 原人에 대한 찬미가)는 노래한다. “바라문은 그(뿌루샤)의 입이고/ 그의 팔로부터 끄샤뜨리야가 만들어졌고/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와이샤가/ 발로부터 수드라가 태어났다.”(Rv.x.90:12) 이것이 인도의 정통적인 계급관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나쁜 놈이다. 왜냐하면 내 일기장에 너는 나쁜 놈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이 진술은 과연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비천함과 고귀함을 논하려면 최소한의 객관적인 기준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본경은 이런 존귀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최고로 존귀한 사람이라고 일컫는 바라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등에 대해서 암밧타라는 바라문 학도와 세존의 긴장감 감도는 대화로 진행되고 있다. 

뽁카라사띠라는 연로하고 유명한 바라문의 제자인 암밧타라는 바라문 학도는 스승의 분부를 받고 많은 바라문 학도들과 함께 세존을 뵈러온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당부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거만한 태도로 세존과 대면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러한 거만한 태도는 자신의 인격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고 암밧타를 타이르신다. 이에 격분한 암밧타가 바라문에 대한 선민의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면서 경은 점점 긴장감이 감돌게 된다. 

본경은 세존과 암밧타 간에 긴장감 감도는 대화를 통해서 세존께서는 참으로 존귀한 사람, 진정한 바라문, 참답게 삼베다에 통달한 삼명(三明, tevijja) 바라문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성, 고귀한 인품, 높은 식견으로 일단 쉽게 풀이해 볼 수 있는 계․정․혜 삼학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신다. 

이런 자질을 갖추어야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존귀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옛 바라문 선조들을 팔아서 일꾼 노릇이나 하면서, 삼명의 타락의 입구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단지 생계유지를 위한 직업 바라문이 되고 만다고 엄히 꾸짖으신다.

이 경을 통해서 세존께서는 참으로 베다(Veda)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계율과 삼매와 통찰지의 삼학을 닦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동시대 바라문들에게 권고하신다. 즉 참된 바라문은 계․정․혜 삼학을 닦는 자이지 베다 만뜨라를 외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⑷「소나단다 경」(Soṇadaṇḍa Sutta, D4)

인도 문화는 계급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를 선도해 오고 지켜온 집단이 바로 바라문 집단이다. 이미 앞의「암밧타 경」을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바라문 계급의 선민의식은 참으로 강하였다. 그러면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참된 바라문이란 무엇인가? 순수 혈통을 가진 자가 진정한 바라문인가? 삼베다에 통달한 자가 진정한 바라문인가? 멋진 외모를 갖춘 자가 바라문인가? 바른 품행을 갖춘 자가 바라문인가? 현명하고 슬기롭고 학식이 있는 자가 진정한 바라문인가?

본경은 세존과 소나단다라는 연로하고 유명한 바라문 사이에 있었던 참된 바라문이라고 인정하는 요인에 대한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소나단다는 참된 바라문이 되는 요소로 모두 다섯 가지를 든다. 그리고 그 다섯 가지 가운데서 버릴 수 있는 것을 하나씩 버리면서 최종적으로는 계행이 청정함과 지혜로움의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확정한다.(§20)

이처럼 본경은 소나단다 바라문이 참된 바라문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은 계행과 지혜에 대해서「사문과경」에서 정리한 계의 정형구와 8가지 지혜야말로 진정한 계행과 지혜임을 천명하고 있다. 

앞의「암밧타 경」이 젊은 바라문 학도와의 설전을 바탕으로 바라문들의 타락에 대한 준엄한 비판을 하면서 진정한 바라문의 길을 보여준 경이라면, 본경은 도대체 어떤 기준을 가지고 바라문이라 하는가에 대해서 소나단다라는 연로하고 학식 있는 바라문과 합리성과 이성에 바탕 한 진지하고 격조 높은 대화를 통해 심도 있게 점검해 보고 있다.


⑸「꾸따단따 경」(Kūṭadanta Sutta, D5)

인류는 일찍부터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찾고 아울러 그 섭리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교류를 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그러한 현상으로 여러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제사라는 문화 현상이다. 이런 제사 문화는 고대 인도문화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바라문들은 베다의 찬미가를 바탕으로 방대한 분량의 제의서를 만들어 가면서 실로 다양한 제사 의식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므로 제사 없는 바라문교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세존께서도 이러한 인도의 가장 중요한 문화 현상인 제사에 대해서 진정한 제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사에 대한 불교식 대답이 바로 본경이다. 그러므로 본경은 인도 사회와 문화의 입장에서 볼 때 그만큼 중요한 경이다.

본경에서는 꾸따단따라는 유명한 바라문이 세존을 친견하고, “세 가지 제사의 성취와 열여섯 가지 제사의 필수품들”에 대해서 질문을 드린다. 꾸따단따의 질문에 먼저 세존께서는 전생 일화를 통해서 동물을 죽이고 나무를 베고 하는 대신에 16가지 덕을 갖추어 널리 보시하는 제사를 설하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수승한 것으로 ① 계를 갖춘 출가자들을 위해서 보시하는 것 ② 사방승가를 위해서 승원을 짓는 것 ③ 깨끗한 믿음을 가진 마음으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는 것 ④ 깨끗한 믿음을 가진 마음으로 오계를 받아 지니는 것 ⑤ 그리고 본 품에서 23가지로 정리하고 있는 계․정․혜 삼학을 갖추는 것을 설하신다. 이처럼 이상적인 제사를 궁극적으로는 계․정․혜 삼학의 실천으로 설하시는 것이 본경이다.


많은 인도학자들은 불교가 인도대중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의례․의식의 단순명료화를 든다. 바라문 제사는 거행하기 어렵다. 제사는 큰 공장의 기계(yantra)에 비유되었다. 대기업의 공장에서 복잡한 공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진 큰 기계는 한 곳이라도 고장 나면 제품을 생산해 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제사의 절차 가운데 한 부분이라도 잘못 거행되면 천상이라는 과보를 생산할 수 없다고 제의서들은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복잡한 공정으로 이루어진 제사는 엄청난 경비가 든다. 보통사람들은 제사의 주인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꾸따단따 바라문도 덜 번거롭고 덜 어려우면서도 더 많은 과보와 이익을 주는 방법을 부처님께 여쭙고 있다. 

불교는 의례․의식을 중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의례․의식에 집착하는 것[戒禁取]은 해탈을 방해하는 족쇄라고 가르친다. 본경에서 설명하듯이 10선업도 등의 계행과 선정과 지혜 등 실제생활 속에서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초기부터 불교는 제사 등의 복잡한 의례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시하고 계를 잘 지니면 천상에 태어난다[施․戒․生天]고 가르친다.


⑹「마할리 경」(Mahāli Sutta, D6)

여기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적인 삶의 방식과 구조를 과감히 버리고 집을 나와 독신으로 살면서 자기 내면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궁구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들을 일러서 출가자라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출가자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는「사문과경」을 통해서 이미 그 전체 구조를 살펴보았다. 이제 다시 본경에서는 삼매 수행을 통한 신통이라는 하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과연 그것이 출가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가를 점검하고 계신다.

본경은 마할리라 불리는 릿차위의 옷탓다에게 설하신 것이다. 환속한 수낙캇따가 옷탓다에게 말하기를, 세존 아래서 삼매 수행을 통해서 천상의 모습들은 보았지만 천상의 소리들은 듣지 못했다고 하자, 그 원인을 말씀해 주신 뒤에 이런 삼매 수행이 출가의 목적이 아니라고 하시고, 출가는 네 가지 성자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팔정도를 닦아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삼매와 삼매를 통한 신통은 분명히 가능하지만 이것은 출가의 궁극이 아님을 천명하시고 팔정도를 통한 해탈의 실현이 출가의 궁극이라 설하시는 것이 본경의 핵심이다. 이것은 삼매 수행이나 좌선 지상주의에 잘못 빠져드는 요즘 일부 수행자들이 깊이 새겨봐야 할 가르침이다.

그런 뒤 다시 두 유행승의 예로써 계․정․혜를 설하시는데 팔정도를『장부』제1권『계온품』의 주제인 계․정․혜 삼학과 배대(配對)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다음 제7경의 내용이기도 하다.(아래「잘리야 경」 편을 참조할 것)


⑺「잘리야 경」(Jāliya Sutta, D7)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진다. 그중의 하나가 소위 말하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이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천착해 보고 있는 경이 바로「잘리야 경」이다. 세존께서 꼬삼비의 고시따 원림(園林)에 머물고 계실 때 만딧사와 잘리야라는 두 유행승이 세존을 뵈러왔다. 그들은 세존께 “참으로 생명이 바로 몸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몸은 다릅니까?”라고 질문을 드린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부처님께서는「사문과경」(D2)에서 정리하신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를 설하시는 것이 경의 전체 내용이다.

그들은 4선의 정형구와 7가지 통찰지의 정형구를 말씀하실 때까지는 육체와 영혼이 같은가 다른가라는 그들의 의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가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는 경지 즉 누진통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자아와 몸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질문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비구에게 ‘참으로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그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물론 ‘생명이 바로 몸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몸은 다릅니까?’라는 이러한 질문은 저 유명한「작은 말룽꺄 경」(M63, 한역『중아함』의「전유경」) 등(D9, M72)에서 부처님께서 설명하시지 않은 열 가지 문제[十事無記]에 속한다. 수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론적인 단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독화살 비유경」(箭喩經)으로 잘 알려진「작은 말룽꺄 경」(M63)과「뽓타빠다 경」(D9) 등에서는 십사무기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으시고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설하셨지만 여기서는 일단 그들의 질문을 물리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그것을 바탕으로 본 품에서 23가지로 정리한 계․정․혜의 경지를 설해 들어가시면서 최종적으로 번뇌의 소멸[漏盡通]을 설하셔서 그들의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는 뜻이다.

존재론적 실체에 대한 수행자들의 끈질긴 집착은 무섭다. 본경이 그렇고 특히「뽓타빠다 경」(D9)이 그러하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나라 수행자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성불을 이야기하고 돈오를 이야기하고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이야기 하지만 기실은 여래장, 불성, 주인공, 마음을 모두 존재론적 실체로 이해해서, 이러한 자아나 대아와 하나 되고 계합되는 것쯤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최상승인 양 떠벌리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⑻「깟사빠 사자후경」(Kassapasīhanāda Sutta, D8)

출가란 세속 생활방식의 포기이다. 그러면 출가자의 삶은 어떻게 세속적인 삶과 달라야 하는가? 인도의 오래된 사문 전통에서는 출가자가 밟아야 할 길로 고행을 주장해 왔다. 고행이 아니라면 도대체 출가와 세속적 삶이 다를 수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경에서도 고행주의자 깟사빠는 고행이야말로 사문의 본업이요 바라문의 본업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과연 이러한 고행이 출가자의 삶의 방식이어야 하고 출가의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고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바로 본경의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고행이 출가자의 목표가 아니라고 세존께서는 본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출가는 계․정․혜 삼학을 완성해서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로 표현되는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지, 단지 고행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씀이다. 

세존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나체 수행자 깟사빠는 마침내 계의 구족과 마음의 구족과 통찰지의 구족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세존께서는「사문과경」(D2)에서 23가지로 정리하여 설하신 계․정․혜 삼학으로 대답하신다.(§§18~20) 그리고 계속되는 부처님의 사자후를 듣고 크나큰 환희심이 생긴 나체 수행자 깟사빠는 세존 아래로 출가해서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23)


⑼「뽓타빠다 경」(Poṭṭhapāda Sutta, D9)

인간의 정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인간을 설명하시면서 심리현상들[行, 상카라] 가운데서 인식[想, 산냐]을 따로 독립시켜 오온에다 따로 인식의 항목[想蘊]을 넣으셨다. 그러면 도대체 이러한 인식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인식이 있다면 인식하는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적어도 영원한 인식이 있어서 그것을 자아라고 불러야 하지 않는가?

이런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 바로 본경이다. 본경에서는 이러한 인식과 인식을 하는 자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존재하는가를 두고 뽓타빠다라는 유행승과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고 심도 깊은 대화가 전개된다. 역자는 본서 제1권의 중요한 경 세 가지만을 들라면 주저하지 않고「범망경」(D1)과「사문과경」(D2)과 본경을 들고 싶다.


본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주신다.

① 인식은 수행의 정도에 따라 바뀐다.

② 무소유처가 인식의 구경이다. 

③ 인식의 완전한 소멸도 가능하다. 그것을 상수멸이라 한다.

④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은 그것이 아무리 미묘하고 섬세하다 하더라도 존재론적 실체인 자아가 아니다.

⑤ 어떤 방식으로 자아를 상정하든 그것은 바뀔 수밖에 없다. 존재란 흐름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유가 응유(curd)로, 생 버터로, 정제된 버터(ghee)로, 최상의 버터[醍醐]로 바뀌어 가는 것과 같다. 자아라는 것은 흐름의 특정한 기간의 특정한 상태를 인습적으로 이름붙인 것일 뿐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 


이처럼 본경에서 말하는 인식은 단순히 대상을 무엇이라고 아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경에서 말하는 인식은 매순간 촐랑대는 그런 종류의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수행을 통해서 실현되는 삼매의 경지 혹은 경계에서 드러나는 고상한 인식(sukhuma-saññā)을 말하고, 이는 사문들이 삼매 수행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일종의 이념이나 이상향 등을 나타내는 술어이다. 그러므로 본경에서 말하는 인식[想, 산냐]은 자아라는 인식[我相], 중생이라는 인식[衆生相], 영혼이라는 인식[壽者相], 개아(個我)라는 인식[人相]으로 대표되는 금강경의 4상(相, 想, 산냐)과 일맥상통한다. 

본경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처럼 ‘존재론적 실체, 즉 자아란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존의 고구정녕하신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뽓타빠다는 안타깝게도 계속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세존께 질문한다.

본경은 무언가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는 그런 관념과 관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결코 부처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우리 불교 수행자들도 깊이 새겨볼 말씀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이름만 불교를 하고 있지 어쩌면 대아, 진아, 주인공, 불성, 여래장이라는 존재론적인 실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깨치고 그것과 하나 되거나, 아니면 그것의 은총과 광명으로 살려는 발상을 굳게 움켜쥐고 놓지 못하고 있지나 않는가? 참으로 이런 다른 발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 다른 수행, 다른 스승, 다른 가르침을 불교라는 이름으로 거머쥐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자는 부처님의 고구정녕한 메시지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뽓타빠다는 세존의 말씀을 공감하고 세존을 존경하였기에 세존의 신도는 되었지만 자아라는 존재론적인 단정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세존 문하로 출가하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본서 제8경의 나체 수행자 깟사빠와 대조가 된다. 깟사빠는 계․정․혜 삼학의 길이야말로 사문이 닦아야 할 본업이라는 세존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해서, 고행이야말로 사문의 본업이라는 그의 견해를 버리고 세존의 문하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러나 본경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찟따는 자아와 세상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심이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열반의 실현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파악하고 부처님 문하에 여덟 번째로 출가를 결심한다. 그는 이전에 일곱 번이나 출가와 환속을 거듭했지만, 본경을 통해서 부처님의 이와 같은 심심미묘한 가르침을 정확히 파악하였기에 다시 여덟 번째로 출가를 감행하여 다시는 환속하지 않았고 아라한이 되었다. 존재론적인 가설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던 유행승 뽓타빠다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


⑽「수바 경」(Subha Sutta, D10)

세존께서 돌아가셨다. 세존께서는 성도하신 뒤 45년 간을 인류를 위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세존이 반열반하신 지금 우리는 도대체 세존의 가르침을 어떻게 정리해서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세존 입멸 직후의 불제자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재가와 출가를 망라한 우리 불자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관심일 것이다. 이러한 중차대한 사항을 수바라는 바라문 학도는 25년 가까이 세존을 시봉했으며 세존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칭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난다 존자에게 질문하고 있다.

수바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아난다 존자는 “성스러운 계의 무더기[戒蘊], 성스러운 삼매의 무더기[定蘊], 성스러운 통찰지의 무더기[慧蘊]를 그분 세존께서는 칭송하여 말씀하셨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을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셨다.”라고 먼저 대답한다.(§1.6) 그리고 수바가 이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자, 아난다 존자는 이 각각의 무더기를「사문과경」(D2)에서 정리한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로 대답을 하는 것이 본경 전체의 구성이다.(§§1.7~2.37)

본경은 아난다 존자가 세존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경이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 일대시교(一大示敎)를 계․정․혜 삼학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난다 존자가 이렇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일차합송에서 아난다 존자의 제자들에게 전승의 책임이 맡겨진 이『디가 니까야』의 첫째 품인『계온품』은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가 핵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계․정․혜는 불교의 전부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연기․무아라 할 수 있고, 이것을 진리 체계로 구성한 것이 사성제이며, 이것을 실천 체계로 완성한 것이 팔정도요, 이것을 확대하면 37조도품이 되고, 팔정도를 다시 간추린 것이 계․정․혜며, 이것을 다시 3戒-4禪-8通의 정형구로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장부』제1권인『계온품』의 기본 골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⑾「께왓다 경」(Kevaddha Sutta, D11)

예나 지금이나 범부 중생의 지대한 관심 중의 하나는 신통이나 기적이다. 특정 종교 교단의 어떤 성직자나 수행자가 신통을 나투면 삽시간에 많은 신도들이 생길 것이고 그 교단은 탄탄하게 뿌리를 내릴 것이라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범부들을 유혹하고 있다. 본경은 께왓다라는 재가 신도의 간청을 통해서 불교 신도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유혹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그러한 신통이 쓸모없음을 설하신 뒤에 이『계온품』의 주제인 계․정․혜의 가르침이야말로 진정한 신통이요 진정한 기적임을 드러내 보이신다.

본경을 통해서 세존께서는 신통의 기적과 [남의 마음을 알아] 드러내는 기적[觀察他心神變]과 가르침의 기적[敎誡神變]이라는 세 가지 신통이 있다고 말씀하신 뒤(§3) 앞의 두 가지 신통에는 좋지 않은 여러 사항이 있으므로 이러한 신통의 기적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멀리하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으신다. 그리고 나서 가르침의 기적[敎誡神變]에 대해서 본 품에서 23가지로 정리한 계․정․혜의 정형구로 길게 설명하신다.(§§8~66) 

그런 뒤 어떤 비구가 신통으로 사대천왕부터 시작하여 13번째로 대범천에게까지 가서 “도대체 어디서 이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즉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는 남김없이 소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아무도 해결을 해주지 못하고, 마침내 세존께로 돌아와서 질문을 드리고 해탈․열반에 관한 궁극의 말씀을 듣는 일화를 소개하는데, 계․정․혜 삼학을 통한 해탈이 신들을 찾아다니는 신통보다 더 수승하고 더 귀중함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아무튼 본경도 삼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경이다.


⑿「로힛짜 경」(Lohicca Sutta, D12)

깨달은 자는 무엇을 해야 하나?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남에게 그것을 드러내어 가르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 아닌가? 서울 지하철과 서울역 앞에서 공공연히 해대는 전도단들의 광적인 행위를 너무나 많이 목격한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본경은 이처럼 전도단들의 집요한 종교공세에 짜증난 분들에게 전하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로힛짜라는 연로하고 유명한 바라문이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여기서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유익한 법을 증득했다 할지라도 유익한 법을 증득한 뒤 남에게 전해 주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남이 남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마치 이전의 속박을 자른 뒤 다른 새로운 속박을 만드는 것과 같다. [남에게 전하는] 이것은 사악하고 탐욕스런 법이 되고 만다고 나는 말한다. 참으로 남이 남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견해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2)

세존께서는 질책받을 만한 스승들을 질책하는 것은 사실이고 옳고 법다워서 비난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계․정․혜를 실현한 스승이 그러한 궁극의 길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마치 왕이 왕국의 모든 생산품을 혼자 독식하려는 것과 같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발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을 위한 구세대비(救世大悲)가 없는 스승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라는 단호한 말씀이다.

깨닫고 나서는 나무 등걸이나 돌덩이처럼 그냥 멍하니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분들은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바른 법을 설한다. 그것이 성자들의 무연(無緣)의 자비이다. 이웃과 바른 법과 바른 도를 함께 나누는 자가 진정한 불자다. 


⒀「삼명경」(三明經, Tevijja Sutta, D13)

부처님 당시 인도 바라문들의 유일한 염원은 그들의 신인 범천(브라흐마)이 거주하는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따라 오는 의문이 어떻게 하면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게 되느냐는 것이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누구든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범천으로 서술되고 있는 천상(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길을 설하고 계신다.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라는 두 바라문 학도가 서로 각각 자기 학파에서 가르치는 도만이 진정으로 범천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지만 서로를 설득시킬 수가 없어서 세존께 찾아와서 이 뜻을 여쭙는다. 세존께서는 그들이 바라문들의 가르침은 벗어남으로 인도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장님 줄서기 비유(§15)와 달과 태양에 가는 길에 대한 가르침(§§16~18)과 나라의 제일가는 미녀의 비유(§19)와 사다리의 비유(§21)와 아찌라와띠 강의 비유(§24)와 범천과 소유물의 가르침(§31) 등으로 그들의 가르침의 부당함을 말씀하신다.

그러자 마침내 두 바라문 학도는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께서는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알고 계신다.’라고 들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서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시기를 간청한다.(§39) 그러자 세존께서는 「사문과경」(D2)의 계의 구족과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함까지 설하시고(§§40~75) 뒤이어 자애, 연민, 같이 기뻐함, 평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四無量]을 비유와 함께 설하신다.(§§76~79) 본경에서는 본서「사문과경」(D2)에 정리된 삼매[定]와 통찰지[慧]에 해당하는 정형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와셋타의 관심과 질문이 범천에 이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세존의 이러한 확신에 찬 말씀을 듣고 두 바라문 학도는 세존의 재가 신도로 귀의하는 것으로 경은 끝을 맺는다.(§82) 본서 제3권「세기경」(D27)에 의하면 그들은 그 후에 세존 문하로 출가하여 견습 기간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내 구족계를 받고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디가 니까야 (長部, 길게 설하신 경) (1/2/3)

각묵 스님 옮김/신국판(양장)

제1권: 616쪽/ 제2권 600쪽/ 제3권: 688쪽

정가 : 각 권 30,000원 (초판 2006년, 3쇄 2010년)

* 제3회 보현학술상 수상